J,
네가 몇 살이 되었던 너는 내게 영원한 소년이자 큐피드이다.
네 눈동자에 어려 있던 그 슬프도록 깊고 맑은 호수의 잔상을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너는 대한민국 수재들이 모였다는 경기중학 학생이었고,
나는 갈래머리 이화여고 학생이었다.
한국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다는 너는 지나친 조숙아.
타고난 천재성을 주체할 수 없어 너는 현실에 뿌리 내리지 못하고 음악과 미술과 시에 빠져들었다.
어둑신한 르네상스 뮤직홀에서 유난히 반짝이던 너의 흑요석같던 눈동자,
백지에 무수히 그리고 그려 대었던 너의 펜 그림들과 시어(詩語)들,
철학이며 문학이며 예술이며 종횡무진하게 섭렵하였던 너의 천재성과 조숙함으로
너의 친구들은 모두가 연상의 대학생이거나 여대생이었다.
내가 너와 어떻게 말을 텄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먼저 말을 트는 적은 거의 없었으니 아마도 네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을 것이다.
너는 내게 존칭을 썼지만 누나라는 말을 하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너는 내게 한장의 그림을 내밀었다.
4B연필로 그려진 그림의 주인공은 바로 나였다.
너는 나를 보지 않고도 나를 그대로 그림속에 투영시켜 놓음으로서 나를 전율케 했다.
너는 내게 편지를 보내올 때마다 펜 그림 삽화를 그려넣었고 음악 부호를 곁들여
편지를 하나의 화첩이자 악보로 만들어 놓곤 했다.
조숙한 너는 내게 끊임없이 사랑의 은어를 던져왔다,
하지만 내 가슴 속엔 네가 아닌 다른 존재가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바로 네가 그토록 좋아하고 따르던 너의 선배이자 대학생 형이었던 H였다.
아, 정말이지 참으로 아름다웠던 너와 그리고 H.
너는 내 가슴 속에 네가 아닌 H가 들어차 있음과 H또한 내게 남모를 감정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곤
나와 그에게 사랑을 화살을 당겨주었고,
우리는 네가 당긴 사랑의 화살을 맞고 운명적 사랑에 빠져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게 이런 말을 하였다. 훗날 우리 셋이 같이 살자고.
J
그 때는 정말 그러고도 싶었다. 한데 세월은 우리 모두를 떼어놓고 말았다.
J
나는 지금 네가 어느 하늘 아래 살고 있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다.
너는 영원히 나이 들지 않는 나의 영원한 소년이자 큐피드.
너의 이름은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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