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톨릭신자라 고해성사(고백성사)의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고해성사란 인간의 죄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흠이 생긴 걸 회복 시겨주는 화해의 성사라고도 한다.
고해성사는 나를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키기도 했지만때론 아무에게도 발설하기 싫어 오직 신과 나만의 문제로 끌어안고 싶거나 또는 이런 것도 죄라고 봐야하나 하는 인간적 회의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정확히 아는 바는 없지만 죄의 개념은 우선 인간 개개인의 양심과 각 종교가 정한 계명 및 인간이 살아오며 관습화 된 사회 규볌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복잡미묘한 인생을 살아내려면 인간은 율법과 현실을 놓고 방황도 하게 된다.
그래서 상황 윤리라는 것도 거론되어진다.
게다가 인간의 양심이란 것도 저마다 달라 어떤 이는 분명한 죄를 놓고도 아무 가책을 못느끼는가 하면
어떤 이는 아주 작은 실수나 오점을 놓고도 괴로워 하기도 한다.
또한 나라마다 지닌 문화적 차이로 같은 행위가 어디서는 죄가 되기도 하고 어디서는 정당화 되기도 한다. 소말리아(? 기억이 아리송)같은 나라에선 여아들에게 할례를시킨다고 하는데 이를 거부하면 창녀 취급을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얼마 전 한 교우에게 나로선 좀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자기네 본당 신부님이 '자위 행위'도 죄이니 그것도 고해성사 항목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더란 거였다.
자위 행위란 것이 만천하에 공개하며 해도 좋을 일은 분명 아니며 어쩔 수 없이 자기만의 공간에서
은밀하게 자행되는 음지의 행위임엔 틀림없지만 그렇다고 여기에 죄라는 굴레를 씌우는 건
나는 좀 무리라고 생각되었다. 인간에게 성욕이 없다면 모를까 인간적 그 욕구가 잘 해결되지 않을 때는
자위라도 해야하는 게 아닐까싶고, 지나친 식탐으로 과식을 하는 것을 종교에서 죄라고 규정하듯 나는 자위란 것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남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남자. 특히 젊은 남자의 자위 행위는 마치 설사 증세처럼
참아내기 힘든 게 아닐까싶기도 하다.
그 얘기를 듣고 나서 아는 교우들에게 자위를 죄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다.
두 사람에게 해봤는데, 한 사람은 아니다, 라고 했고 또 한사람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내 평생 잊지 못할 고해성사가 몇 번 있었다.
최악의 고해성사는 고등학교 시절의 일로 신에 대한 회의를 고백했을 때 나를 신앙으로부터 떨어져나가게 한 노 신부님께 받은 고해성사였다.
나는 그 한번의 고해성사로 십여 년 세월을 성당에 발을 끊고 냉담자라는 오명을 쓰고 살았다.
그만큼 실망이 컸고 내심 상처도 깊었던 것이다.
당시 내 고백의 내용은 이런 거였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믿음을 가져보려고 매일 미사도 참예해보지만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내 고백을 들은 할아버지 신부님의 말씀은 이러했다.
"그건 마귀의 훼방이니 더 기도하고 노력하세요."
나는 속으로 소리질렀다.
'고작 그런 고리타분한 말씀밖에 못하시나요? 신부님이 제 노력을 알기나 해요? 노력하고 있잖아요, 이렇게. 학교 다니면서 매일 미사에 나와 울면서 신에게 기도도 드리구요...."
두번째 고해성사는 30대 시절 의 일로 루도비꼬 신부님에게 받았던 건데
냉담 중이던 나는 이 고백성사로 아주 열심한 신자로 되돌아오는 계기가 되었다.
그 때 내가 왜 고해성사를 봤는지 모르겠으나 암튼 이런 고백을 했다.
"남편을 사랑하려 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제 가슴 속엔 아직 저의 첫사랑이 떠나질 않고 있고 그를 사랑합니다.
그래서 늘 마음으로 간음하며 살고 있습니다."
나는 그때까지도 사춘기적 그 노신부님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당연히 한 소리 들을 줄 알았다.
한데 의외의 말씀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건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남편과 그 분을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만 해결울 하려 하지 말고 하느님께 그 문제를 맡겨드리고 간절히 기도하며 그분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의례적인 훈계를 추측했던 나는 그 말씀에 콧날이 시큰해왔다.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해방감도 느꼈다.
그리고 참으로 기적같은 일이 벌어졌다.
결혼 이후 단 하루도 내 가슴과 뇌리에서 떠나가지 않던 H가 내 의식에서 지워진 것이다.
기억상실이 되었다는 게 아니라 그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말이다.
당연히 정신의 간음도 더 이상 할 필요가 없었다.
내가 무슨 대단한 의지로 노력을 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되었다.
세번째는 40 초반 적의 일이다.
당시 내 신앙심은 무쇠라도 녹일 듯 뜨거웠다.
외부 활동도 활발했고 봉사도 많이 하며 신자들과의 교제도 빈번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우연한 기회에 한 교우를 비방한 적이 있었다.
어느 모임에 가니 교우들이 대놓고 A의 비난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열심한 신자였지만 집안 일을 제쳐 놓고 너무 신앙에만 몰입하는 경향이 있어
자주 주위 사람들의 입질에 오르내렸고 나는 늘 그게 불만이었다.
당시 그녀의 집안 환경이 워낙 어려웠기에 이해가 안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주부의 입장을 고려할 때 도가 지나친 것 같아 평소 그녀에게 입바른 소리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막무가내렸다. 이런 상황에 그녀에 대한 성토가 벌어지고 있으니 나는 물 만난 고기였다.
한데 그녀에게 누적되었던 불만이 있다보니 내가 그만 오버를 하고 말았다.
어쩌다보니 그녀의 행위를 실제보다 조금 과장되게 발설하고 만 것이다.
나는 그녀와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어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이 가시권에 있었다.
허나 돌아서 생각하니 오버한 부분은 분명 내 잘못이었다.
나는 얼마 후 살던 동네에서 이사를 갔고 그날 함께 했던 교우들과는 연락이 어려워
내 말을 수정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가끔씩 속앓이만 하고 있었다.
살아오며 뒤에서 남을 험담했던 적이 어디 한두번이었을까만 과장을 했다는 건 내 양심이 허락질 않았다.
더구나 A는 평소 나와 가까운 사이였기에 양심의 가책이 떠나질 않았다.
깊은 반성과 통회를 하고 어느 날 고백소로 들어갔다.
당시 고해소에 들어가 죄를 고백하고 나면 신부님은 성서를 읽으며 묵상을 하라거나 기도를 하라는
보속을 주시는 경우가 많았다.
한데 레오 신부님은 전혀 다른 보속으로 나를 놀라게 하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게 아닌가.
"뒤에서 남을 험담하는 건 정말 좋지 않은 일입니다. 보속은 자매님이 험담한 그 교우의
명예를 회복시켜주는 것입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하세요. 아셨지요?"
구약시대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식의 복수동태법이 있었다고 하나
그 신부님은 보속도 그런 식으로 내려주신 셈이다.
나는 그 보속의 실천 여부가 자신없어 모기만한 소리로 "네"라고 대답하곤 고해소를 나왔다.
벌써 한참 지난 일을 새삼 들춰내기도 그렇고 함께 자리했던 교우들을 찾아내기도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우선 연락이 닿는 교우 두 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곤 당시의 얘기를 상기시키며 그 때 내 말에 약간의 과장이 있었음을 밝히고 A를 곡해하지 말아주기를 당부헀다.
나머지 세 명은 찾기도 힘들고 나와 가깝게 지낸 관계도 아니어서 그냥 넘겼다.
그리곤 A를 만나 자초지종을 실토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청했다.
결코 악의가 있는 건 아니었는데, 왜 말이 그렇게 과장스럽게 나와버렸는지 모를 일이었다.
A의 성격이 예민한 터라 나는 그녀가 내 말에 도리어 상처 받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그녀를 만났다.
A는 깔깔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였을 거야. 하지만 나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어.
안나, 괜찮아. 정말 괜찮아. 뭘 그런 걸 갖고 그래."
나는 그제서야 그 문제로부터 완전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가톨릭의 고해성사를 놓고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특히 개신교 측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고해성사란 자신의 죄 문제를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상담받을 수 있는 좋은 장치이기도 하다.
기독교의 교리로는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면 주예수의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나
A와의 경우 나는 신 앞에 충분히 반성하고 회개했기에 이론적으론 죄사함을 받았을 터이지만 그래도 미진한 구석은 남아 있었다. 신이 용서를 한다 해도 자신이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나에게 고해성사는 구원의 성사가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