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을 먹고나서 티비를 틀었더니 KBS 스패셜에서 '울지마 톤즈' 이태석 신부님의 뒷 얘기를 다룬
프로를 방영하고 있었다.
<울지마 톤즈>를 보며 얼마나 많은 관객들이 감동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렸던가.
신부님의 웃는 모습에 다시금 콧날이 시큰하며 눈이 젖어왔다.
한 사제의 사랑과 섬김의 삶이 이제는 한국을 떠나 전세계를 감동으로 울리는 모양이다.
한 때는 왜 하느님은 이태석 신부의 죽음을 하용하셨는가 하고 볼멘 소리를 해댄 적도 있었다.
그것은 보다 많은 이태석 신부님들(성직자를 의마하는 게 아니라)을 태어나게 하려는 섭리가 아니었을까.
그 분은 한 알의 밀알이었다. '
새삼 '어떻게 살것인가?'하는 생각이 화살처럼 뇌리에 꽂힌다.
루도비꼬 신부님 생각도 났다.
80년 대 그 날 밤의 일을 나는 잊지 못한다.
남편은 직장을 그만 두고 수중에 돈은 다 떨어져 생활에 대한 염려가 생존의 염려로 강등되었던 그 시절,
하루는 늦은 밤에 신부님이 연락도 없이 우리 집엘 찾아오셨다.
나와 부부 싸움을 하고 집을 나갔던 남편과 함께였다.
처음 현관 벨 소리가 들렸을 때 나는 당연히 남편 혼자 있을 줄 알고 일부러 기선 제압을 하려
인상을 있는대로 구기고 문을 열었다.
툭하면 직장을 때려치우는 남편을 지켜보며 인내하는 것도 이제는 바닥이 나
내 실망과 분노가 극점을 달리려 할 무렵이었다.
한데 이를 어쩌랴. 삐죽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건 남편이 아닌 신부님의 웃는 얼굴이 아닌가.
나는 잠을 자다 말고 일어났기에 사자머리를 하고 있었다.
식탁 위엔 아직 치우지 않은 초라한 저녁상이 구겨진 신문지로 옹색하게 덮여 있었다.
거기엔 치우지 않은 밥그릇과 김치 쪼가리와 먹다 남은 가자미 토막이 빗살같은
뼈를 들어낸 채 말라가고 있었다.
부부싸움을 핑게로 나는 주부로서의 도리를 엉망으로 방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심 남편이 돌아오면 내가 당신으로 얼마나 망가져 있는가를 일부러 보여주고 싶었다.
옷매무새며 머리 꼴이며 집안 꼴이며....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었다.
그 때 신부님이 거실로 들어서며 말씀 하셨다.
"안나씨, 나 밥좀 줘요."
그러면서 제지할 사이도 없이 식탁에 앉으시며 신문지를 들추었다.
밥은 있었지만 반찬은 그게 다였다.
신부님께 못 볼 꼴을 다 들켜버리고 나니 더이상 추락할 것이 없다는 배짱에
마음이 되레 담대하고 편안해졌다.
그 날 신부님은 말라빠진 반찬으로 밥공기를 비우셨다.
그리곤 우리 부부를 소파에 나란히 앉히고 당신이 우리 사이로 앉으시더니
우리의 손을 양쪽으로 잡아주셨다.
신부님은 별 말씀을 하지 않았으나 내 가슴은 포근하게 녹아들고 있었다.
만약 신부님이 그날 내게 설교를 하셨더라면 나는 한치의 위로도 받지 못했을지 모른다.
그냥 함께 해주며 내 고통을 지긋이 잡아주신 게 어떤 위로보다도 좋은 약이 되었다.
한 때는 봉사의 삶을 살겠다고 여기저기 돌아다닌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생활에 매이고
육신이 고달파 실현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내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좀더 섬기는 자세로 살아가고 싶다.
습관화된 위악적 농담도 지양해야 할 일이다.
책상 앞 선반에다 '울지마 톤즈'라고 연필 글씨를 써놓았다.
내 마음이 메마르고 사악해지려 할 때마다 이태석 신부님을 떠올리고 싶다.
영원한 가치는 사랑 밖에 없고 사랑이란 우선 내 곁에 있는 이를 섬기는 일일 것이다.
섬김의 행위가 희생이 아닌 내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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