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경계선

tlsdkssk 2011. 3. 1. 00:45

경계선

카트를 밀며 묵묵히 따른다. 앞장선 아내와 두 세 발자국의 간격을 일정하게 유지하도록 신경을 쓴다. 아내가 두리번거리면 따라 멈추고, 물건을 집으면 얼른 카트를 대령한다. 오늘은 절대 이것사자 저것사자 조르지 않기로 작정하였다.

몇 달 만에 따라나선 시장보기다. 지난 번 다녀간 후 느낀 바가 있어 오늘은 구루마쟁이만 하기로 했다. 그 때가 여름이었나 보다. 쌈 거리 야채를 사면서 내가 욕심을 부려 자꾸만 집어 담았던 게 탈이었다. 며칠을 두고 먹다가 결국 반이나 버리지 않았던가. 그 뿐인가. 소고기를 골라 담았는데 그 옆에서 내가 닭고기를 주워 담고, 생선가게에서 볼일을 마쳤는데 내가 낙지 한 축을 더 담았다. 그것들 모두 후유증을 남겼었다.

그 날 이후 아내는 내 도움을 청하지 않았다. 대형매장인 양재동 하나로클럽에서 생필품 일체를 일주일 단위로 사들이는 우리 집 장보기는 누군가가 도와주면 좋았다. 카트는 유치원생 한 명이 덤으로 타고 앉아도 될 만큼 큰데다, 어쩌다 바퀴가 한 쪽으로 쏠리는 놈이라도 걸리는 날이면 여간 힘들지 않다고 했다.

남자들도 제법 보인다. 밤에는 젊은 부부들이 많이 찾는다는 새 풍속도가 보도된 적도 있다. 노신사 한 분이 할머니에게 야단을 맞는다.

“이 무 어디 것이요? 맛있어요?” 할머니가 묻자, “철원 무라요. 맛 있고 말고요.” 종업원의 대답. 노신사가 끼어들었다. “아, 맛있냐고 물으면 맛없다고 하갔어?”

“이 해물 싱싱하오?” “아~ 안 싱싱하다고 하갔어?”

할머니가 약이 올랐다. “오지 말라니깐 따라 와갔구선 난리야! 지랄이야!”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웃음을 참으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푸짐한 것을 좋아하는 내가 입을 열기 시작하면 큰일이다.

먹성이 남달리 좋은 것이 문제다. 오죽하면 식당의 밥그릇 크기가 한가지인 것에 불만일까. 우리나라 음식문화에서 가장 불합리한 점을 나는 음식점의 밥그릇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대, 중, 소의 세 가지로 구분해놓고 주문 받아야 마땅하지 않는가. 80kg인 남자와 50kg인 여자에게 왜 밥그릇이 똑같은가. 옷은 L, M ,S로 잘도 구분하면서.

공산품 코너에 가서도 사람 구경만 한다. 청소용품을 기웃거리다 펑크린을 집기에 얼른 카트를 대령하고 한마디 한다. “맥혔나?”

구루마쟁이가 운전기사가 되어 집으로 온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만났던 그 노신사의 얼굴이 문득 떠올라 하하 웃는다. 워낙 하관이 발달한 얼굴인데다 부어서 입이 주먹만 하게 나왔었다.

웃다가 문득 깨닫는다. 내 웃음이 그의 얼굴 때문만은 아님을. 조심스레 도와준 것이 이것저것 간섭하거나 과잉친절을 했을 때보다 훨씬 아내를 편하게 해주었다는, 내 역할의 만족감 때문임을. 살림살이는 여자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사라고 하는 것은 간섭이고 더 집어 담는 것도 간섭이다. 혹시 잊어버린 건 없는지 신경을 써주는 것이 과잉친절일 수도 있고, 바짝 붙어 따라 다니는 것도 과잉친절에 해당한다. 시장보기에서 내 도움을 사양하고 있는 이유가 그런 것들이 아니던가.

하지만 어디까지가 도와주는 것이고 어디까지가 간섭일까? 그 경계선이 어디일까? 오늘은 묵묵한 짐꾼이 좋았지만 이다음 어느 날엔, 기분에 따라서는, 왜 그리 덤덤하냐고 하지는 않을까?

경계선은 나와 상대방 사이에 놓여 있는 선이다. 그것은 쌍방의 사정에 따라 가변적일 수밖에 없다. 때로 내 쪽으로 움푹 들어와 있을 수도 있고, 때로 상대방 쪽으로 불룩 나가 있을 수도 있다. 경계선 그 자체가 가변적이라면 그것을 헤아려 지킨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사람들은 가까운 사이가 될수록 그런 경계선을 허물려고 한다. 인간의 한계성을 망각한 착각과 욕심 때문일 것이다.

어쩌겠는가. 가장 확고한 결혼의 기반은 우정이라 했고, 친할수록 몸가짐을 조심하라는 말도 있으니, 생활을 함께 하면서 나누는 이 우정에 경계선은 정신 똑바로 차려서 지키고 볼일이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이 경계선의 정확한 위치를 끊임없이 깨달으며 실천하는 연속이라고나 해야 할지 모르겠다.

2002년 9월 (200×11매)

올렸는지 찾아보니 없어서 졸고지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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