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여행에서 만난 시간

tlsdkssk 2010. 8. 22. 22:15

여행에서 만난 시간

-시간의 의미-

 

줄을 선다. 출국심사를 받기 위해서다.

내가 선 줄은 수속이 더디다. 줄을 옮긴다. 수속을 마치고 지정된 게이트 쪽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본다. 처음 섰던 줄의 내 앞사람이 이제야 겨우 대기선으로 나서고 있다. 결국 나는 약 두 명 의 수속시간을 번 것이 된다.

시계를 본다. 보딩타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면세점에 들리거나 책을 읽을 생각도 아니고 딱히 할 일도 없다. 그렇다면 내가 번 시간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간을 생각한다. 시간은 아껴 써야 하는 것이라고 배웠고 지금껏 그렇게 살아 왔다. 내가 가끔 약속시간에 늦는 것은 시간 낭비를 하지 않으려 함에도 그 원인이 있다. 늦는 만큼 시간을 아껴 쓴 것이라고, 비평을 감내해야할 시간관념을 나는 갖고 있다.

게이트 앞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시간을 이번 여행의 길벗으로 삼기로 하고 빈 의자에 앉아 생각을 계속한다. 시간이란 무엇일까? 책에서 읽은 것인지 내 사유의 세계에서 나오는 것인지 출처는 불분명하지만 머릿속을 스치는 것들이 있다. 수첩을 꺼내어 적기 시작한다.

‘시간은 공기와 같은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 공기와 함께 시간을 부여받는다. 시간과 공기를 놓는 순간 그는 일생을 마감한다.’

또 이렇게 적는다. ‘사람은 자신이 흐르면서 시간이 흐른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간은 그 자체가 무한자이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 그냥 있는 것, 절대자와 함께 있는 것, 그것이 시간이다. 흐르는 것은 인생이다. 강물은 인생이며 산은 시간이다. 산은 흐르지 않는다.’

탑승이 시작된다. 사람들이 일어나 줄을 선다. 그러나 나는 그냥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선다.

기내에서 이륙을 기다린다. 이 무거운 물체는 대체 어떤 속도에서 뜰까. 이륙에는 속력이 필요하다. 속력은 시간과 거리의 상관관계이다. 그렇다면 이때 시간의 의미는?

비행기는 유체의 진행방향과 수직인 방향으로 작용하는 힘 곧 양력(揚力)에 의해 뜬다. 날개의 각도인 양각(揚角)과 일정 속도 이상으로 유체를 진행시키는 속력, 그 두 가지에 의해 일어나는 양력이라는 운동 힘… . 스크린을 본다. 활주로를 질주하는 기체의 앞이 들리면서 몸이 젖혀지기 시작한다고 느꼈을 때 화면에서 순간순간 바뀌는 속도는 시속 2백km를 나타낸다. 실상 시속 2백km는 별 것이 아니다. 지상을 달리는 TGV의 시속도 3백km를 넘는다지 않는가. 그러나 유선형의, 양각의 날개를 달고, 시간이라는 속력을 갖춘 이 물체는 큰 일을 해내었다. 수백 명의 사람과 많은 화물을 싣고… .

속도는 단위시간당 거리로 나타내지만 거리는 결과일 뿐 그 과정은 시간이 아닌가. 결국 시간이란, 사용하는 방법에 따라 그 차이는 땅과 하늘임을 생각한다. 창밖으로 보이는 저 날개와 이 유체의 모양 등은 시간을 사용한 방법이 된다. 어쨌든 물리학에서의 시간은 거짓이 없다.

한편 시간의 길이는 그 자체로서 절대적인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가끔 경험한다. 어느 출장자가 아침 먹고 비행기를 타고 남의 나라에 가서 점심을 들고 오후에 중요한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에 선상(船上)파티에 초대되어 술을 곁들인 만찬을 즐긴 후 혼자 조용히 공원을 산책하면서 하루를 정리하였다면 그는 ‘하루가 이렇게 긴 시간인가’라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만찬 후 술을 계속 마시다가 이국의 공원을 산책하지 않은 채 밤늦게 호텔에 돌아와 쓰러져 잤다면 그 날의 시간은 분주하고 짧았던 하루로 기억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생활 한가운데서 이러한 시간의 비물리성(非物理性)을 본다. 그러므로 시간이란 더디 간다고 타령할 일도 아니고 빨리 가버린다고 한탄할 일도 못되는 것이다. 순간이 모여서 세월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진리이지만, 무료하고 지루했을지라도 그 순간들을 모아 놓은 세월은 빠르다고들 말한다. 이것을 시간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까,시간의 길이가 인식의 문제로 귀착되는 폭이 큰 탓이라고 해야 할까.

벳부(別府)에 비가 내리고 있다. 온천지역에 왔으니 비가 오는 것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낮부터 온천욕을 한다. 목욕 문화가 발달한 일본인들이 시간을 고무줄처럼 늘리고 있음을 본다. 탕에서 나와 한 잠씩 자고 다시 탕에 들어갔다가 이번엔 정원에 앉아 풍욕을 한다. 다시 탕에 들었다가 또 잠깐씩 누워 있다. 그렇게 풀코스로 온천욕을 하는데 두 시간 남짓 걸린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시간은, 느끼기에는 네댓 시간일 터이다.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 나름으로 쓴다.

많은 일을 하였거나 파란만장한 일생을 보낸 사람이 시간을 길게 쓴 사람이라고 하면 맞는 말인가. 시간을 음미하면서 느릿하게 보낸 사람이 시간을 길게 쓴 사람이라고 하면 틀린 말인가. 그런 것들을 한가하게 생각하고 있는 지금의 내가 시간을 늘리고 있는 거라면 그 또한 맞는 말인가, 틀린 말인가.

영혼에도 수명이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우리의 영혼도 ‘시작이 있는’ 유한자임이 그 근거였다. 영혼이 육신과 함께 생겨나고, 죽음 또한 하나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영혼 불멸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형상적인 것에 연관되지 않은 무한자임을 오늘 생각하면서, 영혼도 시간과 함께 수명이 없으리라는 인식에 접근한다. 내가 생각했던 영혼은 ‘형상적인 영혼’이 아니었을까. 존재론적 실재주의(realism)에 근거한 영혼이 아니었을까. 시간이 우주만물로부터 독립한 무한자 그 자체임을 깨우치면서 영혼도 순수형상 즉 무한자일 것이라는 생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비행기가 김포에 착륙한다.

나의 길벗, 시간은 내게 이렇게 작별인사를 했다. “이번 여행은 즐거웠네. 또 만나세. 나는 당신과 늘 함께 있네. 나는 당신의 영혼과도 함께할, 당신의 영원한 길벗이라네.”

시간이 내게 한 그 인사말은 내가 절대자에게 들은 최초의 말씀인 것 같다.

1998년. 11월. (200 x 16)

 

젊었을 때는 시간을 아껴 쓰느라 시간에 꼭 맞추어 살려고 했다. 이제 시간이 남아돌아가는 나이를 살고 있으니 여유 있게, 시간을 아끼지 말고 살아야겠다. 오랜 세월 버릇이 되다시피 하여 매사에 여유 있게 살지 못한다. 지금도 약속시간에 늦는 때가 있다. 꼭 맞추어 살지 말고 예비시간을 충분히 가지며 생활하련다.

2006년 4월

요즘도 약속장소에 나가면 늘 늦다. 10분전에 도착하려고 나가보면 다들 나와 있다. 꼴찌를 면하려면 조금 기다려주겠다는 마음가짐으로, 20분전에 나가야겠다.

2006년 6월

  ** 12년전에 쓴 글인데, 사랑방 풍경에 보니 없어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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