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스크랩]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tlsdkssk 2010. 4. 30. 17:13
 

                 

 

                

수필>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한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시점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다. 설령 어떤 추억이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이 찾아든들 사념은 이내 순한 아이처럼 잠에 들곤 한다. 귀살쩍던 시절을 흘려보낸 이즈막의 평화가 좋아 선가 세월 가는 것도 별로 서럽질 않다. 세월은 앗아가는 만큼이나 또 새로운 걸 안겨주지 않던가.


  프랑스의 전설적인 가수 에디트 삐아프의 삶을 다룬 영화 한편을 보았다. 라비 앙 로즈(La vie en rose)라는 그 영화는 시간의 순서를 무시한 채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진한 눈물을 흘리게 했다. 삐아프의 삶이 주는 감동은 무엇보다도 그녀 자체가 진흙탕에서 피어난 사랑스런 장미꽃이란 점일 것이다.

  그녀는 1차 대전 전란 중 하층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난한 거리의 가수요 아버지는 떠돌이 서커스 단원이었다. 무능력한 부모는 어린 삐아프를 방치해버린다. 자연 그녀를 에워싼 토양은 더러운 늪지처럼 음습하고 불결하며 몹시도 퀴퀴하다. 허나 그 비극성이 주는 배경으로 그녀의 노래는 더욱 빛이 났고 그녀의 향기는 나를 그윽이 취하게 했다.

 

  삐아프를 접한 것은 사춘기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노래들을 시도 때도 없이 읊조리곤 했다. 불어 발음을 흉내 낼 수 없어 흥얼거릴 뿐이었지만 <장미빛 인생>, <사랑의 찬가>, <빠담 빠담>… 에 젖어 샹송의 도시 빠리를 동경하곤 하였다.

  훗날 그 명곡들은 여러 가수들에 의해 다시 불려졌으나 누가 부르던 내게 있어 귀환점은 언제나 에디트 삐아프였다. 그녀의 노래들은 묘한 중독성이 있는지 이 나이 이르도록 그 멜로디를 떠나보낸 적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가슴이 장미빛으로 물들 때나 시름에 겨울 때나 하물며 밥을 짓다가도 나는 곧잘 그녀의 노래를 흥얼대곤 하였으니. 

 

  <라비 앙 로즈>를 나는 두 번이나 감상했다. 두 번째는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친구를 위해 보았는데 웬일로 첫 날 보다 더 많은 눈물을 쏟았다. 눈물은 버석거리던 내 마음을 봄비처럼 촉촉이 적셔준 것 같다. 눈이 벌겋도록 울고 있는 내 모습을 누군가 보았다면 늙은 아줌마의 청승쯤으로나 여겼을 테지. 아무튼 나는 요즘 전보다 더 많이 그 노래들을 달고 산다.

 

  세상엔 재능 넘치는 가수들이 부지기수다. 하여 만약 그녀에게 음악적 재능만 있었다면 그토록 긴 여운은 남지 않았을지 모른다. 삐아프의 노래가 가슴을 파고드는 건 아무래도 그녀가 주는 비극성에 있을 것이다. 그녀를 떠올릴 적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어둔 색채들. 불우했던 유년시절, 거리의 가수, 교통사고, 이혼, 술과 사랑…. 무엇보다 강열한 인상을 남기는 건 죽음으로 끝을 맺는 연인 마르셀과의 로맨스다. 더불어 평생토록 삐아프를 따라다닌 그녀의 사랑관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날 한 기자가 그녀에게 이렇게 물었다.

  “여성들에게 조언할 것이 있다면?”

  그녀가 대답하기를,

  “사랑하세요.”

  기자는 이어 젊은 여성과 아이들에게 해줄 말을 묻지만 역시나 같은 답을 준다. 그녀에겐 노래와 사랑만이 신산한 삶의 구원이었던 듯싶다.

 

  나는 한 때 인간의 감성이 세월 속에 닳아지는 줄만 알았다. 나이 들면 웃음도 눈물도 마른 꽃처럼 시들 거라 여긴 적도 있었다. 공원이나 전철 안에서 머리 허연 노인들이 이성을 향해 주고받는 눈길을 못 견뎌했다. 그건 마치 나이 들면 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만큼이나 당치 않은 착각이었다는 걸 이제는 안다. <라비 앙 로즈>가 그것을 새삼 상기시켜주었다. 멜로디와 노랫말을 새기는 순간 왜 그리도 찌릿한 전류가 과장스레 훑고 지나가던지….

  라비 앙 로즈(장밋빛 인생)의 노랫말 중엔 이런 달치근한 대목이 나온다. 

 

  그대가 나를 안아줄 때나

  혹은 밀어를 속삭일 때

  내 인생은 장미빛으로 변하죠

 

  남녀의 사랑이란 기실 얼마나 독한 욕망이자 감미로운 환(幻)인가. 칙칙한 삶도 사랑 앞에선 장미빛으로 변하느니….

  사랑의 화신 삐아프의 영향일까. 황혼의 뒤안길에 봇물 터지듯 아련한 그리움이 밀려온다. 내 인생을 장미빛으로 수놓았던 어떤 만남과 이별과 재회가 영상처럼 밀려온다.

  그러나,

  지금은,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이다.   (14매)

  

  

       

   

 

 


                                                            

 

 

  

       

   

 

출처 : 장미와 미꾸라지
글쓴이 : 애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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