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어머니, 그 이름

tlsdkssk 2011. 3. 11. 18:23
 

2003년


                                                어머니, 그 이름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란 단어 앞에 서면 나는 왠지 주눅부터 든다. 이 나이 먹도록 내게선 도무지 ‘어머니’가 주는 그 고졸한 태깔이 묻어나지 않으니 말이다.

  나는 자식이라곤 아들 하나밖에 두지 못했다. 그 이상을 원치 않았으니 스스로 모성 능력을 거세시킨 셈이지만 그렇다고 어미 노릇을 못해본 건 아니었다. 첫 출산에 25시간이 넘는 진통을 했으니 한번에 애 두엇 낳는 값은 치룬 셈이고, 젖이 풍부하여 아이 배가 불끈하도록 원 없이 물려보았는가 하면, 낮밤이 뒤바뀐 치다꺼리로 단잠 한 번 못 자봤으니 얼추 땜질은 한 셈이다. 게다가 아들은 어릴 적에 사고와 잦은 병치레로 내 애간장을 적잖이도 태웠다. 한데도 어머니란 이름 앞에 서면 쭈뼛거리게 되고, 장성한 아들이 이따금 어머니라 불러줄 때면 내 이름이 아닌 듯 어설프기만 하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지난 날 뜨개질이라곤 모르던 내가 이웃 엄마들 어깨너머로 배워가며 아들의 조끼를 떠 입혔던 것은. 바느질이라면 단추조차 달기 싫어하는 위인이 아들 거라면 양말이며 내복이며 참말이지 지성으로 기워 입혔다. 그건 내가 알뜰해서라기보다 어머니로 입문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나 더, 어린 시절 뜨개질로 우리남매의 옷을 지어주시던 어머니, 저녁상을 물리고 나면 식구들의 헤진 양말을 수북히 쌓아 놓고 머리카락보다도 더 가는 필라멘트가 바르르 떨고 있는 알전구를 넣어 야무지게 기워주시던 내 어머니의 잔상이 아물거린 때문이었다.

 

  아들의 옷을 깁는 그 시간이 얼마나 행복했으면 나는 아이 옷이 조금 터지거나 흠집에 생기면 기다렸다는 듯 지레 헝겊 대고 바느질을 해대었다. 바늘로 한 땀 한 땀 꿰맬 적마다 녀석의 개구진 소행이 대견하기만 하고 내 정성이 덧대어지는 것 같아 혼자 흐뭇하였다. 어쩌면 나는 은연중 ‘엄마’에서 ‘어머니’로 승격되고자 애를 쓴 건지도 모른다. 하긴 이쯤 되고 보면 얼추 어머니가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어머니로 승격하기엔 아직 뜸이 덜 든 밥처럼 뭔가 미흡한 듯싶다.   

 

  자평하자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 강하게 키우려 한 취지는 좋았던 것 같다. 나는 아들이 준비물을 빠뜨린 채 학교에 가도 여간해선 쪼르르 달려가지 않았다. 내 볼일을 핑계로 아이 혼자 집에 두는 시간도 적지 않았다. 아들이 그렁그렁 눈물 매달며 불만을 토하면, 나는 엄마인 동시 아내이며 또 나 자신이란다, 라고 타이르며 아이의 입을 막았다. 이른바 나는 오늘을 사는 현대적 어미였고, 아이는 고작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런 나와는 아주 판이한 어머니들이 있다. 오래 전 한 수녀님께 들은 얘기다. 여러 남매의 막내였던 수녀님은 자기 어머니가 다른 엄마들보다 늙은 것이 그리도 못마땅했었다고 한다.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무렵쯤엔 모친의 이가 거의 빠져 틀니를 해야 했는데, 하필 새로 맞춘 틀니가 채 준비가 되지 않아 마냥 추레한 노파의 모습이었다. 수녀님은 그런 어머니가 졸업식장에 올까 지레 걱정되어 몇 번이나 졸업식 날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헌데도 그 어머니는 졸업식장에 슬며시 얼굴을 들이밀었다. 수녀님은 화가 나고 창피하여 눈을 흘기며 원망했고, 어머니는 이런 딸을 향해 손짓으로 어서 가라는 시늉만 했다.

 

  식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며 수녀님은 한 걱정이 되었다. 뱁새눈을 날리며 아는 척도 않았으니 분명 치도곤을 들으리라. 그러나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맞아주며, 졸업하는 막내딸의 모습이 하도 보고 싶어 갔었다는 말만 하더란 것이다. 수녀님의 모친은 무학(無學)이었다. 그날 이후 수녀님은 당신의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다고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대지와 어머니는 동의어라고 한다. 한 시절, 나도 터 너른 집에 살며 어머니 같은 흙의 고마움에 깊이 감동한 적이 있었다. 음식 찌끼의 악취도 흙에만 닿으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게 신기하고 놀라웠다. 흙은 온갖 오물을 마다 않고 품고 삭혀서 걸은 토양을 만들어 채소를 키우고 꽃을 탐스러이 피워대는 것이었다. 수녀님의 어머니 또한 품 너른 대지와도 같이 재고 자르는 일이 없이, 감추거나 꾸밀 줄도 모르는 채 우직한 듯 당연한 듯 철없는 자식을 품으셨던 모양이다.

 

  하지만 나라면 그런 몰골로는 절대 학교에 가지도 않았을 테고, 설령 갔다고 해도 자식 놈에게 그런 대접을 받은 것에 한 마디쯤 따끔히 짚어줬을 것이다. 

  문우 윤근택 선생의 모정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자식을 열씩이나 둔 가난했던 산골의 어미는 병든 아들을 위해 노구의 몸으로 바람받이에 선 소나무 잎이 좋다기에 나뭇잎을 따려 나무를 타다 떨어지기도 했다. 미꾸라지를 약에 쓰려 개울에 나섰다가 그만 유리 조각에 발바닥을 싹둑 베이기도 했다. 그도 모자라 두꺼비 앞에서 슬픈 노래를 부르기까지도. 밭고랑에서 우연히 마주친 두꺼비를 잡아 놓고, 두꺼비 오줌이 약이 된다는 말에 그의 모친은 밤새 미물 앞에서 구슬픈 노래를 불렀다는 것이다.

‘두껍아, 두껍아, 이 가련한 할망구의 소원 하나만 들어다오. 불쌍한 우리 아들 약으로 쓰려하니 오줌 한 방울만 누어다오.’

  결국 어머니의 지극한 정성 때문인지 그의 와사풍은 물러갔다.   

 

이제 두꺼비에게 슬픈 노래로 소원을 비는 어미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전설의 존재일 뿐 세상은 이제 맹목으로 헌신하는 어미에게 더 이상 현모라고 부르기를 주저하며 모성은 세월 따라 지성화 되고 현대화 되었다. 그렇긴 해도 여전히 고집스레 흙의 어머니를 그릴 수밖에 없음은 왜인가. 

  부르는 그 이름 조금씩은 달라도, 인간이 불러온 영원의 성채 어머니. 언제쯤이나 나는 어머니가 되어 질 수 있을까. 어머니, 엄니, 옴마이, 어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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