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혜의 골방

[스크랩] 목숨

tlsdkssk 2010. 4. 30. 17:11
 

<수필>

                                 

                                                    목숨                                    

                                                                    



목련 잎 떨군 게 엊그제만 같더니 가지에 불거진 꽃봉오리가 제법 실하다. 친정어머니 연세 올해로 여든. 작년 6월에 내려진 암 선고로 해를 넘기실까 걱정했는데 다시 춘 삼월을 맞는다.

10년 전 이맘때였다. 친정에 갔더니 어머니가 이웃 할머님의 부음을 전한다. 고인의 춘추가 칠십이라기에 얼결에 “사실만큼은 사셨네요.”했더니 어머닌 쓸쓸히 “그러냐?” 하신다. 내 정신 좀 봐. 등잔 밑이 어둡다고 어머니가 칠십인 걸 그만 깜빡하고 만 것이다. 향년 칠십이면 그리 애석한 삶은 아닌 듯싶었는데 어머니 일로 다가오자 마음이 달라져 나는 즉시 말을 바꾸었다. 무병하게 10년쯤 더 사셨으면 좋겠다고. 그리 되면 큰 한은 남지 않을 것 같다고.

인간의 적정 수명을 서른 살이라고 보았던 건 치기어린 10대적의 일이다. 오직 젊음만을 누리다 가고 싶어 그 이상 목숨이 붙어 있으면 스스로 끊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었다. 그 적정 수명은 세월과 함께 나잇살 찌듯 늘어나더니, 실언을 했던 그 해 가을 최종(?) 결론을 내렸다. 의학도 발달하고 평균 수명도 늘어나는 추세니 80년은 사는 게 무난할 거라고.

하지만 그건 타인의 경우일 뿐 나 자신은 칠십 정도만 살아도 섭섭하지 않을 것 같았다. 임어당도 말했듯 인생 칠십이면 웬만한 건 다 알 수 있고, 웬만한 즐거움은 다 맛 볼 수 있지 않은가. 그의 말처럼 인간의 어리석음을 바라보며 슬기를 깨닫는 데는 부모 자식 손자의 3대란 세월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그 때만 해도 나는 칠십이 아득하다고 여겼다. 오십 중반을 넘기고 나자 십여 년 남짓 남은 칠십 고개가 큰길 건너 마주 뵈는 동네만큼이나 가깝게 느껴진다. 그 저편의 세월이 의식될 때마다 마음엔 조급증이 일기도 한다. 아직은 하고 싶은 일들이 적잖이 있는데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으니.

방사선 치료를 받아온 어머니는 살만큼 살았노라 혼잣말을 하시곤 한다. 자식들에게 아프다는 말을 하기 싫어 당신 혼자 병원을 찾기도 한다는 게다. 어머니는 몸의 이상이 있을 때마다 병원 치료를 받을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죽음을 맞을 것인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가슴 아프면서도 한편으로 마음 놓였다. 어머니가 생에 지나친 집착을 보이셨으면 내 심정이 오죽 더 착잡했을까.

목숨에 지나치게 연연하는 노인의 모습은 언제 보아도 안타깝다. 절명(絶命)에 닿지 않은 자의 여유인지 모르나 그래도 그 심경을 조금은 숨겨주었으면 싶다. 방에 즐비한 약병과 건강식품들, 모든 활동을 멈춘 채 오직 수명 연장에만 촉각을 돋우는 원시적 생명력을 대하노라면 못내 슬퍼지는 것이다.

활발한 사회 활동을 하는 지인이 있어 그에게 몇 살까지 살았으면 좋겠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준비된 명함을 내보이듯 간단하고 명료했다. 지적활동을 할 수 있을 때까지라는 것. 만약 소생 불능한 중병에라도 걸리면 어쩌겠느냐 묻자, 아마도 스스로 목숨을 거두지 않을까 싶단다. 그의 말 역시 섣부른 예단에 불과할 테지만, 한편으론 공감이 갔다. 생로병사의 삶을 두고 나 또한 미리 그려본 상상 속의 죽음이 암만이었나.

물론 생명을 쉽사리 포기하진 않을 게다. 의미를 잃었을 때, 사는 것이 오직 숨쉬기의 연장일 뿐 자타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못할 때, 그런 삶이 오래도록 주어질 때 생명 끈을 놓을 것 같다는 얘기다. 회의는 있다. 생동하고 빛나는 것만이 삶이며 늪 같은 고통은 삶이 아닌가. 육신의 질병이란 단지 걸레처럼 쓸모없는 것인가. 그 고통이 인간에게 주는 영혼의 정화 작용은 포기하란 말인가. 만약 그 고통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언제까지 그 시한을 유보할 것인가.

노인들 중엔 잠자는 듯 죽기를 희망하는 분들이 많다. 간혹 그런 죽음을 본다. 어머니도  입버릇처럼 잠자듯 떠났으면 좋겠노라 하신다. 어머니만의 바람은 아닐 것이다. 인생의 오복(五福)에도 고종명(考終命)이라는 게 있다. 즉 편안히 죽는 게 복중의 하나라는 것. 바라는 게 다만 편한 죽음뿐인 벼랑 앞의 목숨, 사위어 가는 촛불을 지켜보며 나는 어머니가 앞으로 10년만 더 사시기를 바라고 있다. 원대로 10년을, 아니 20년을 더 사신들 그 이별이 덜 슬플 리 없다. 어쩌면 나는 고작 어머니 가신 뒤의 내 슬픔을 더 염려하는 건지도 모른다.

봄볕이 오늘 따라 화창하다. 햇살 머금은 꽃망울은 밀반죽 부풀 듯 벙글어 오고, 초목엔 거짓인 듯 다시 푸른 잎이 돋고 있건만 사람 떠난 자리엔 웬일로 잎도 꽃도 필 줄을 모른다. (13매)




 


출처 : 장미와 미꾸라지
글쓴이 : 애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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