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년 5월
남자에게 꽃을 주다
J 씨께 선인장을 선물했다. 가시 촘촘한 식물을 선물한다는 건 좀 별난 일인지 모른다. 희귀 품종도 아닌데 하필 그걸 택한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다.
2년 여 대구에 머물 때였다. 살고 있는 아파트는 바로 큰길가에 있어 먼지가 많았고 서향집이었다. 내부마저 불편한 구조라 베란다 말고는 화초들을 둘 곳이 마땅찮았다. 서울에서 가져간 화분이 꽤 있었건만 베란다의 화초들은 하나둘씩 죽어가기 시작했다.
대구의 더위는 유난스러워 복중이면 아스팔트 지열로 베란다 온도가 40도까지도 올라간다. 자식 같은 식물이 더위에 스러지는 걸 보며 나는 종종 울적해지곤 했다. 낯설고 말씨 설고 기후마저 힘든 타향살이였다.
죽어가는 생명을 보려니 애처로운 마음에 차라리 남은 것마저 얼른 죽기를 바랐다. 그런 심정으로 한 겨울에도 베란다 창문을 열어 둔 채 식물들을 방치했는데 그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게 꽃기린선인장이다.
그 많던 화초를 다 죽이고 다시 서울로 오게 되었을 때 마음엔 깊은 감회가 어렸다. 선인장의 끈질김에 대한 감동이랄까. 귀를 뚫는 소음과 분진, 숨 막히는 더위와 추위, 무관심의 서러움 속에서 어쩌면 저리도 꿋꿋이 살아났을까. 이후로는 꽃기린을 내 수호신인양 소중히 여겼고 그 생명력을 배우고 싶었다.
J 씨는 남편의 친구로 근래 퇴직을 한 분이다. 한 시절 직장에 남긴 족적이 컸기에 허탈감이 더 큰 것 같았다. 지난날엔 축하 선물로 쌓이는 난분을 주체하지 못해 사무실로 들어오는 난분은 모두 부하 직원에게 돌려야 했다고 하나, 이즈막엔 가정적인 비운마저 겹쳐 빈 난분 몇 개가 있을 뿐이란다.
화초 분갈이를 하면서 나는 꽃기린을 둘로 나누었다. 묵은 뿌리를 과감히 잘라내고 이파리도 쳐 내고 모양새를 다듬으며 혼잣말을 했다. ‘꽃기린, 앞으론 네가 그 댁의 자리를 메워 드려라. 이제 그 분께 네 힘과 기(氣)를 전해 드리렴. 산다는 건 때론 사막을 견디는 일 아니겠니.’
이렇게 하여 난생처음 남성에게 꽃 선물이란 걸 하게 되었다. 당분간 꽃기린은 몸살을 할 테지만 다시금 뿌리를 내리고 새 잎도 돋울 것이다. 상처 난 제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말이다.
J 씨는 이따금 꽃 얘기를 전해 온다. 화분에 물을 주었다고, 누렇게 떡잎이 져 걱정했는데, 이젠 제 자리를 잡은 것 같다고, 햇볕을 많이 쪼여주려 아침저녁으로 화분을 옮겨준다고. 하찮은 걸 잘 거두는 그분의 마음이 고맙다. 한데 그는 꽃기린을 선물한 내 속내를 제대로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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