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늘 그리운, 그러나 만날 수 없는

tlsdkssk 2006. 5. 6. 07:45

나는 그녀를 20년도 더 전에  성당에서 만났다.

그녀의 세례명은 '마리아' 였다.

그녀는 별로 예쁜 것도, 매력이 있는 것도, 그렇다고 옷차림이 독특한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다소 뚱뚱하고, 초라함을 벗어난 정도의 옷차림에다

머리는 다글다글 퍼머를 하고 있어 검은 라면을 얹어 놓은 것 같았다.

나이는 나보다 열살쯤 더 많을까. 아니면 나이가 들어보이는 타입인지도 몰랐다.

평소 매력있고 예쁜 여자를 밝히던 나이건만,  첫눈에 그녀에게 필이 꽂혔다. 

 

그녀와 본격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은 명동 성당에서 함께 성경공부를 시작하면서였다.

멀리서만 보던 그녀를 매주 두번씩 만나 아침부터 오후까지 함께 하게 된 것이다. 

만남의 횟수가 쌓여질수록 나는 그녀에 대한 궁굼증이 생겼다.

형편이 그닥 여유롭지 않은 것 같은데도, 늘 풍요롭고,

본인 말에 의하면 가방끈이 그닥 긴것 같지 않은데도 지성이 감돌고,

나대지 않는데도 카리스마가 느껴지고,

아무데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지는 까닭은 대체 뭘까.

위엄이 느껴지되,그렇다고 꼰대처럼 와닿지 않는 그녀의 융통성과 너그러움이라니, 

그녀는 대체 어떤 사연을 지닌 인간이기에 나를 잡아끄는 것일까.

그녀는 이따금 강의 시간에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생활이 바쁜지 때론 오후 강의에만 얼굴을 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많이 피로해 보였다.

그녀의 측근인 한 교우에 의하면 그녀는 집안 일에다, 성당 활동에다,

그녀만의 은밀한 봉사를 하느라 매우 바쁘다는 거였다. 

그녀가 하는 봉사는 남들이 꺼리는 궂은 일이란다.

예를 들면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자리보존하며 똥을 싸대는 할머니를

씻겨드리며 돌보는 일 같은 식의.

그녀는 어려운 사람들이 도움을 청하면 거절하는 일이 없다고 한다.

돈을 꾸러 오면 있는 돈을 다 내주고 떼이기도 했단다.

내가 물었다.

"그러면 가정에 문제가 생기지 않나요? 그 돈을 어떻게 메우죠?"

측근이 말하기를,  그래도 당장 수중에 돈이 있으면 일단은 내어주고,

못 갚아서 문제가 생기면 식당 설겆이라도 해가며 그 돈을 채운다는 거였다.

자기도 그녀에게 많은 신세를 졌다고 하면서...  

중요한 건 그럼에도 그녀의 표정에 어떤 원망이나 그늘이 없다는 거였다.

그녀는 억지로 고행하듯 하는 게 아니라,

들숨과 날숨처럼 자연스럽게 그녀의 몸에 베어 있는 듯 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선행은 늘 타인을 통해 내 귀에 들어왔다. 

마리아, 그녀는 여일하게 여유롭고,

조금은 유머러스하고,  위엄있는 여인으로 일관하였다.

 

그러던 1988년 1월. 우리 집안엔 대형 태풍이 몰아닥쳤다.

남편이 운전하다 인사 사고를 내어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남편도 중상을 입은 데다, 당시 우리 가정 형편은 어려웠고, 피해자 가족이 요구하는 합의금은

우리 형편엔 천문학적인 숫자였다.

강의실에서 만난 그녀가 내 안부를 물으며, 그래도  밥은 거르지 말라고 위로를 전해왔다.

그 날 오후 강의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의 일이다.

그녀가 물었다.

"안나, 나 밥좀 먹고 싶은데, 함께 가줄 수 있겠어? 난 사람이 촌스러워 혼자는 못 가겠어"

"그러지요. 근데 뭘 드시고 싶으세요?"

"글쎄, 뭘 먹으면 좋을까? 안나가 말해봐. 아이구 신나라. 안나 덕에

나도  모처럼 근사한 것 먹게 됐네."

그녀와 나는 버스에서 내려 연희동의 커다란 한식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이내 그녀의 속내를 알아채었다.

그녀는 자기가 먹고 싶었던 게 아니라 내게 밥 한 그릇 사주고 싶은 거였다.

그래놓곤 혹시라도 내가 부담을 느낄까봐  자기 핑게를 댄 것이다.

당시 그녀의 형편도 어려운 것 같았 건만.. 

 

얼마 후 나는 이사를 하게 되었고,

그녀는 용산에 식당을 개업하여 생활이 더 바빠졌다. 

그녀가 차려내는 밥상은 어찌나 푸짐한지 남을 게 별로 없을 것만 같았다.

용산 시절에도 그랬지만,  신탄진으로 이사를 했다 하여

작년에 신탄진 식당에 가보니, 이렇게 장사해서 뭐가 남을까 싶었다.

이제 그녀와 나는 서로 먼 거리에 살고 있어 내가 일부러 찾지 않는 한 만날 길이 없다.

이상한 건 삶에서 지치고 힘들 때마다, 최후의 보루로 그녀를 생각한 다는 것이다.

정말이지 알 수 없다,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아닌 그녀가 1순위로 떠오른다는 것은. 

그녀에게 무슨 다짐을 받은 것도 아니 건만,

어떤 행색을 하고 찾아가든, 나를 맞아주리라는 믿음.

그녀에겐 자존심이나 체면을 생각지 않아도 된다는 이 일방적인 믿음이

대체 어디에서 근거하는 건지 모르겠다.

몇년에 한번 연락을 할까말까 하는데도 무조건 그런 믿음이 간다. 

 

작년 여름, 신탄진에서 몇년 만에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곤 궁굼하던 그녀의 히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그녀는 명문가의 딸로 태어났다.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가정이 몰락했고, 학교를 중단한 채 공순이로 취직하여

오빠의 학업을 도왔다.  (그 오라버니는 국회의원도 지냈다고 한다)

수녀가 되어 평생 봉사하며 살고 싶었으나, 학력이 모자라 입회가 안되었고,

이런 사정을 아는 어느 신부님이 세상에 살며 봉사하는 길도 있다며 중매를 해왔다.

상대는 조카까지 맡아 키워야 하는 형편이 어려운 남성이었다.

 

내가 만난 성녀를 꼽으라면 나는 단연 마리아씨를 1 순위로 꼽겠다.

민들레 처럼 낮은 모습으로 주위에 사랑과 평화와 위로의 홀씨를 날려보내는

그 한 사람을 알고 있다는 건 늘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귀착시킨다. 

이 봄이 다 가기 전, 그녀를 만나러 신탄진엘 다녀와야 겠다.

<그대로 계세요, 어머니 아버지>를 전해드려야지.

그대로 계세요, 나의 마리아 행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