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낯모를 여인의 전화

tlsdkssk 2006. 2. 20. 16:41

일전 낯모를 여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나를 꼭 만나고자 수소문 끝에 전화 번호를 알아냈다는 거였다.

그녀는 수고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내가 사는 동네로 갈 테니

꼭 만나달라고 청하였다.  상대의 목소리가 어눌하여 내키지는 않았지만

우리 동네의 모 수영장 앞에서 만나자고 하였다.

그녀는 내가 자기 얼굴을 모를테니, 붉은 반코트를 입고 나오겠다는 배려를 잊지 않았다.

 

약속날 시간이 되어 수영장 앞으로 나갔더니,

웬 여자가 붉은 코트를 입고 서 있다.

육십 초반의 순진하고 선량해 보이는 여인.

내가 그녀를 흘끔거리며 쳐다보자, 그 쪽에서 먼저 접근해왔다.

"혹시, 안나씨세요?" 

고개를 끄덕이며 이번엔 내가 물었다.

"찻집이 마땅찮은데  걷는 것 괜찮으세요?" 

시각이 일러 찻집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다행히 그녀가 선뜻  

걷자고 한다.

우리는 함께 동네 공원으로 향했다.

 

그녀가 이야기를 풀어 놓기 시작했다.

20년 전 자기 남편이 직장암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내가 찾아와 부의금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뭔가 착각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당시라면 내 코가 석자였던 시절인데,

낯모를 사람에게 부의금을 주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당시 남편은 천주교에 입교하려고 교리를 배우는 중이었단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 이후 세례를 받고(세례명이 루치아란다) 성당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남편이 죽고 나니 먹고 사는 게 너무 힘든데다가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 해도 내가 이미 이사가고 없었다는 거였다.

자식들과 풀칠 하기에 바빠 나를 찾지 못했지만

마음 한쪽에 늘 고마움을 담고 있었단다.

아무리 얘기를 펼쳐놓아도 나는 도무지 남의 얘기를 듣는 것만 같았다.

 

 

공원 산책을 마친 뒤 그녀가 점심을 사고 싶다기에 함께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그녀가 흰 봉투 하나를 쥐어준다.

"아드님이 장가 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어요. 

미리 알았다면 꼭 가서 축하를 해드렸을 텐데, 늦었지만 축의금좀 넣었어요."

한사코 사양해도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그녀를 마주 보며 나를 도리켜보았다.

나는 도무지 둔하여 남에게 베푼 것도, 도움을 받은 것도 기억하지 못하고 산다.

남에게 도움 받은 일은 어딘가에 기록을 해두었을 것이건만,

이젠 나이를 먹어선지 기록장 조차 어디 두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짐 정리를 하려고 옛날 가게부를 들추다가 1988년도에 도움 받은 일들을

낱낱이 메모한 걸 발견한 적이 있었다.

아, 기록(문자)의 놀라움이여!

1988년도는 남편이 운전 중에 인사 사고를 내어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던 해인데,

교우 S가 아들애의 생일 케익을 사다 준 것이 적혀 있었다.

남편은 중상을 입어  병원에 누워 있고,

피해자 가족이 요구하는 금액은 천문학적 금액이고,

허구한 날 밤낮으로 피해자 가족의  협박에 시달리느라

초죽음 상태로 지내던 시절이었다.

사는 일이 암울하기만 했던 그 해의 쓸쓸했던 아들 생일날에 보내온 케익.

그래, 생각 난다.

작은 촛불을 밝히며 아들과 단둘이 실낱 같은 소망을 빌어보았지.

케익에 밝힌 작은 촛불은  <성냥팔이 소녀>가

추운 겨울날 그어댄 성냥불만큼이나 아름답고 따스했었지. 

나보다 더 힘든 처지의 교우 A가 청하지도 않은 50만원을 빌려 준 것도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로 전화를 걸어 온 사람과 그 메세지들이, 

반찬을 만들어 보내준 사람과 위로금을 보내준 사람들의 이름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부끄럽게도 세월이 갈수록 난 그 일들을 하얗게 잊고 지냈다.

 

흔히 은혜를 입은 일은 물에 새기고, 원수진 일은 돌에 새긴다고 한다.

얼굴도 모르는 나를 20년간이나 찾으려 했던 그녀가 놀랍게만 여겨졌다.

그녀는 지금껏 자기에게 도움을 준 은인들을 하나도 잊지 않았고,

기회가 되면 반드시 그 은혜를 갚아왔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그동안 공장과 식당을 드나들며 힘든 노동을 해왔다는 걸 보면 여유가 있어

그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헤어질 때  그녀의 손을 꼬옥 쥐며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늘 건강하세요....."

손을 흔드는 그녀의 얼굴에 햇살이 가득 넘실거렸다.

그녀는 무심한 내게 보은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기 위해

하늘이 보내준 천사가 아니었을까.

나는 그녀를 길이길이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또 하나의 기록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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