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 보았던 몇 편의 영화는 거의가 코믹물이었다.
가벼움을 추구하는 세태에 물이 들었나
쿨하고 가벼운 영화를 찾게 된다.
손예진 송일국 주연의 <작업의 정석>은
새끈(이 신조어의 의미는 각자가 해석해야 할 듯)한 작업녀
손예진과 부전자전인 작업의 고수 송일국의 한판 대결을
보여주는 코믹 로맨스물.
여기서 '작업'이란 제 맘에 당기는 이성을
헌팅하는 작업을 의미한다.
이런 영화를 앞에 놓고
소설을 보는 시각으로 개연성을 따지며
감상한다는 건 물론 큰 넌센스요,
코믹영화에 대한 결례다.
관객은 그저 스크린에 펼쳐지는 대로 구경하다가
이따금 킥킥 웃음이나 터뜨리면 된다.
하지만 한국 영화가 방방 뜨고 있는 이즈음이고보니,
기왕지사 조금만 더 완성도 높은 코믹물이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완성도라, 내가 말해놓고도 참으로 두루뭉실하고
추상적인 표현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주인공의 이름도 기억 못하고, 영화의 장면 조차도
다 증발해버리고 만 지금, 나는 평론가처럼 조리 있는
비평을 할 수는 없다.(또 그럴 필요도 없고)
다만 영화를 보면서 나중엔 조금 지루해 했다는 것을 상기하며
나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영화 속의 억지스런 에피소드 남발은 잠시 웃음이 나오려다가
이내 기어들며 씁쓸한 느낌을 안겨주곤 했으니까.
'넌 내가 여기서 웃을 줄 알았니?'
*
중세 수도원에선 웃음이 죄악으로 간주되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웃음이란 사람들 마음 속에서 '두려움'과 '무거움'을
사라지게 하여 신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라는 것.
당시의 그리스도교는 웃음은 신성한 신의 진리를
조롱하고 왜곡하는 행동이라 하여 금기시 했다는 것이다.
세상이 혼란하고 암울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시대의 사조일까,
관객들은 영화나 TV를 통해 무겁고 심각해지기를 원하지 않는다.
아이고 어른이고 가벼운 농담 따먹기를 즐기고
그것이 일상화 되어 있다.
하기야 웃음이란 우리에게 얼마나 좋은 활력을 주는가.
게다가 한번쯤 웃었다고 진종일 웃기만 하는 세상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수도 원장 호르게처럼
금욕적인 인간도 아니오, 경건주의자는 더더욱 아니지만,
가벼운 웃음에 길들여지고 타성화 돼가는 현대인들을 보며,
가련하게 여겼던 호르게 원장의 입장을 잠시 주목하게 된다.
우리는 다만 킬킬거리며 다음과 같은 후렴을
되풀이 해야만 하는 걸까.
넘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
넘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
그러면 다쳐!
정말?
정말 그런 거야?
*
영화를 보고 나오는데, 누군가 딱한 소년의 이야기를 한다.
장애인 엄마를 모시고, 라면만 먹고 사는 소년이 있다고.
그나마 라면은 엄마 드리고 소년은 굶을 적도 많다고.
팽배하는 외모지상주의와 가벼움을 접하다 보니 일순,
호르게가 염려한 '웃음은 사람들 마음에서 두려움과
무거움을 사라지게 하여 신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는 말이
억지만은 아니라는 것에 일부 공감을 하게 된다.
신을 두려워 하지 않다보면 인간에 대한 예의도
증발되는 게 아닐까.
신(부처, 알라)이란 궁국적으로 인간이 닮아가야할
종착점이라고 여기기에 하는 말이다.
그래선가, 어제 실없는 웃음을 흘리고 난 기분은
어쩐지 그리 상쾌하지 만은 않았다.
어제의 기분 탓이었는지는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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