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40년만에 만난 친구

tlsdkssk 2006. 1. 2. 06:23
일전에 여고 동창을 만났습니다.
나와는 별로 친하지 않았지만,
내 친한 친구의 친구여서 함께 만나게 되었지요.
여름엔 외출을 잘 하지 않는 터라
나는 변변한 여름 옷이 없습니다.
그래서 옷장을 뒤지며 고민좀 했지요.
무얼 입지? 정말 옷이 없네.
친한 벗도 아니고, 근 40년만의 만남이니
무심히 나가기가 싫더라구요.


한참을 뒤진 후 겨우 원피스 하나를 찾아 냈습니다.
H 라인의 그 원피스는 내 체중이 불어난 관계로
다소 불편했지만 꾹 참고 입었지요.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친구는 경제학을 전공했고,
매우 똘똘한 신랑 만나 강남에서 무쟈게 잘 살고 있다는 바람에
저도 좀 예(?)를 갖추고 싶었거든요.
그 친구는 얼굴도 중국 미인처럼 매력적이었으니
얼마나 멋진 부인이 됐겠느냐구요.


한데 약속 시간보다 15분쯤 지나 나타난 그 친구,
푹 퍼진 몸매에,
할머니같은 원피스에,
싸구려 슬리퍼 직직 끌고,
껌까지 질겅질겅 씹으며,
시장 바구니같은 백 하나 어께에
들처매고 등장한 겁니다.
치켜진 눈매만 아니었다면
나는 도무지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했을 겁니다.
본디 13도 각도로 올라갔던 매혹적인 그녀의 눈매는
세월에 눌려 10도 정도로 쳐져 있었지만,
그나마 그것이 그녀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우리 셋은 서울대 교수 식당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그 친구는 이곳이 자기 안방쯤이라도 되는 듯
큰 소리로 마구 얘기를 늘어 놓더군요.
속 끓이는 아들 얘기였는데,
결론인즉 그 아들이 자기를 겸손하게 만든다는 거였어요.
두어시간 혼자 떠들고 난 그 친구는
"서방 잘 만나고 거기다 자식까지 잘 된 것들은
도무지 철이 안드는 것 같애" 하더군요.
말이야 맞는 얘기죠.
인생의 양지만 살아온 사람들이 어찌 삶을 알겠습니까.


결코 지성이 모자란 것도, 눈치가 없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스스로를 희화화 시키며 사는 것 같았습니다.
헤어지며 중년기의 화두인 건강 문제를 물으니,
"나? 머리만 빼고 온몸에 대수술을 8번이나 받았어" 해요.
나와 친구는 그만 입이 딱 벌어진채 그녀와 헤어졌답니다.
어쩌면 그 친구는 도인이 돼 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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