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공작 부인

tlsdkssk 2006. 1. 2. 05:54
오늘 그녀의 부음을 들었다.
이미 일년 전에 타계한 그녀의 죽음을 오늘에사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녀를 공작 부인이라 불렀다.
내가 이사온 이곳 화곡동에서 몇 정거장만 더 가면
'신월동'이라는 촌스러운(?) 이름의 동네가 나오는데,
우리는 거기서 만난 사이였다.

그 부인을 만난 것은 내 나이 30대적,
그러니까 내가 삶에서 겪을 수 있는 갖가지 고통을
종합편으로 겪었던 시절이었다.
같은 발산동 성당 교우인 그녀는 나이가 나보다 훨씬 많음에도
나하고 친하려 우리 집을 자주 찾아왔다.
그 연세에 이화여대까지 나온 멋장이 인테리.
그녀는 신월동으로 흘러들어 오게 된 것을 늘 부끄럽게 여기며
신월동 사람들의 수준이 낮은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도무지 말이 통하는 사람이 없다며 말끝마다,
신월동 사람들은 어쩌고 저쩌고 하는 것이었다.


이미 신월동 주민이 되어버린 나로서는 그 말이 몹시 거슬렸다.
신월동에 살면 그 누구도 신월동 사람이 아닌가.
누구는 뱃속에서부터 신월동 주민이었단 말인가.
그리하여 나는 어느날 작심하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제는 당신도 신월동 사람이라고.
그녀는 뜨끔한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지난 날 얼마나 잘 살았는지 늘어 놓는 것이었다.
정원엔 공작도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딱하게도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공작을 키우던 옛집을 하염없이 그리워하면서...


그녀는 나처럼 아들 하나를 두고 있었다.
하루는 그녀가 말했다.
"우리 아들은 계란 후라이의 노른자가 터지면 안 먹어요.
노른자가 한 가운데 있어야 하죠"
이 모든 게 자신이 아들을 그렇게 키웠기 때문이라는 게다.
그녀는 교양있고, 인정 많아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하였다.
흠이라면 자신의 선행을 늘 공개하는 것이 문제였지만...


내가 새로 이사 온 곳은 화곡동이다.
그러나 이 지역 관할은 발산동 성당이라고 한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발산동은 내가 신앙을 새롭게 다진 곳이며,
무수한 고통을 겪은 곳이며,
숱한 인간 군상들을 만난 곳이기도 하니 말이다.
문득 공작 부인이 떠올라 오늘 한 교우에게 전화를 걸어
그녀의 소식을 물었더니, 이미 한 해전 강원도의 어느 곳에서
쓸쓸히 최후를 마쳤다고 한다.


왜 강원도냐 물으니, 부군과는 오래 전에 사별하고
아들과 함께 살았는데 아들의 사업이 여의치 않아
강원도까지 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만 그녀의 생각에 가슴이 아파 묵주알을 돌렸다.
그녀는 눈을 감을 때쯤 철이 좀 들어 있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공작 부인 시절을 그리워 하며 슬프게 눈을 감았을까.
하느님만이 아실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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