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스크랩] 남한산성 몸풀기(?) 산행

tlsdkssk 2005. 10. 18. 04:37

청계산에 이어 두번 째 산행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몸풀기 산행'이라니, 전날 수리산 종주를 하신 분들이

가볍게 몸을 풀어주는 정도인 줄 알고 나섰지요.

행선지가 남한산성이라니, 감회도 새로웠구요.

제가 다섯살 적에 가족 소풍을 가서 아빠 손잡고 사진을 찍은 곳이거든요.

모란이 필 무렵이라, 저는 모란꽃을 배경으로 찍었습니다.

이미 수리산 종주를 마친 산꾼 낭키와, 제법 산행을 하신다는

문우 서병태 선생님까지 오시라 하였지요.

 

그때까지만 해도, 서 샘님과 제가 폭탄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

'몸풀기니까, 산성을 빙빙 도는 거겠지.

어쩌면 어릴 적의 기억이 되살아날지도 몰라...'

저는 고작 이런  생각을 하며 마천역에 도착했습니다.

 

들머리 오르기는  먼저번 청계산 보다 쉬웠습니다.

든든한 산꾼 낭키를 뒤에 세우고 저는 앞으로 앞으로 전진했습니다.

제법 발걸음도 가볍더군요.

'이제 조금만 더 오르면 산성이 보이고,

그 주변을 탑돌이하듯 빙빙 도는 건가 보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신이 나 있었습니다.

 

허나 오르고 올라도 성벽은 보이지 않고 땀만 비오듯 하더군요.

그 사이 서샘님은 탈락하시고, 네 사람의 행군이 계속되었습니다.

성곽 밖으로 난 좁을 길을 따라 걸을 땐 잡목이 우거져

두 손을 번쩍 들고 걷기도 했습니다.

군데군데 뻗어 있는 나무 뿌리와 돌뿌리에 왕초보는 땅만 보고 걸었습니다.

지난번 청계산 때의 실수를 두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저는 평지를 걷는 것엔 웬만큼 자신이 있는  편이랍니다. 

성 외곽 길은 웅툴붕툴했지만, 거의 평지나 다름 없어

기분 좋게 걸었습니다. 

한 순간,  제가 퇴각하는 빨치산이라고 상상했는데, 얼마나 재밌던지요.

제 속엔 아직 어릴 적의 치기가 한줌 남아 있는가 봅니다.

지난번 청계산 때는 무념무상으로 걸었는데, 이번엔 유념유상, 웬 공상들이

그리도 솔솔 솟아나던지요.

 

얼마쯤 지나, 우리는 성 안으로 접어들어,

성벽을 따라  오르막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좀 전까지만 해도 번개(?)같던  제 발길은

점차 속도가 쳐지며 늘어지기 시작하더군요.

저는 공상을 이었습니다. 

'뒤에서 적군이 쫓아오고 있다. 죽을 힘을 다해 퇴각하라...'

'뒤에서 늑대가 물려고 달려 온다. 젖먹던 힘을 다해....'

그런데 죽을 힘과, 젖먹던 힘은 다 어디로 갔는지요.

 

서샘님에 이어 제가 두번째 폭탄이 된다 생각하니,

미안한 마음만 앞섰습니다.

해는 짧아 이미 사위엔 어둠이 깃들고, 성미 급한 별들은

앞다투어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엔 빠지는 게 낫겠어. 이게 뭐야? 여러 사람 시간이나 빼앗고...'

 미안한 마음에 저는 어쩔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저만치 보이는 야경의 황홀경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상념이 일시에 사라지더군요.

밤의 세상은 별들이 질투를 하리만큼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마침  보름달도 지구의 야경을 내려보는 듯 둥덩실 떠있었습니다. 

나뭇잎은 바람에 서걱이고, 하늘 땅엔 모두 반짝이는 것 뿐이었습니다.  

 

녹산 대장님은 이런 걸 미리 아셨을까요.

어쩌면 아닐 겁니다. 야간까지 이어지리라곤, 두 폭탄의 위력이

이렇게까지 심각하리라곤 미처 모르셨을지도요.

 

여행을 하다 보면, 목적지를 잘 못 찾아 길을 잘 못 든 것이 오히려  더 좋은 비경을 

만나게 해주는 경우가 간혹 있지요. 

여행이나 인생은 때로 닮은 꼴일 때가 있습니다.

폭탄 신세가 된 저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자위하고 있었습니다.

'이게 다 서샘님과 내 덕이지. 우리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어느 술집에서 뒷풀이 한다며

고작 전기불이나 바라봤겠지....'   

 

출처 : 남한산성 몸풀기(?) 산행
글쓴이 : 애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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