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이쁜 할머니

tlsdkssk 2005. 10. 14. 12:12

친정에 들러 하룻밤 자고 왔다.

엄마는 그 동안 쌓인 얘기를 하고 싶어,

조금 흥분해 계셨다.

암 치료 이후 거동의 불편으로 

내가 유일한 엄마의 이야기 상대다.

 

엄마는 내가 들어가자마자

이야기 보따리부터 끌르신다.

엄마의 얘기 중엔 따끈따끈한 최신 뉴스도 있지만,

소뼉다귀 울기듯 하고 또하고 또하고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도 억수로 많다.

예전엔 그 때마다,

"엄만 그 얘기 또햬?"

하고 딴죽을 걸었지만 이제는  

솎아가며  듣고 싶은 얘기만 추려 듣는다.

그래도 표정만은 가급적 진지하고 성실하도록 노력하며

이따금씩 추임새도 빠뜨리지 않는다.

'그래서요?'

' 아아~ 그랬구나'

' 나 참내.....'

'못 되년 같으니.'

때로 내 정신이 삼천포로 빠졌을 땐

추임새가 잘 못 나가 엄마에게 면박을 듣기도 한다.

"넌 내 얘길 코로 듣는 거냐? 잘 돼긴 뭐가 잘돼?" 

일껏 얘기 하는데, 딴청하고 있네."

 

어제는  엄마가 뜬금없이,

"얘, 사람들이 날보고 이쁜 할머니라고 한다."하신다.

나는 음성을 한옥타브 올리며 대답했다.

"그럼, 울 엄마 이쁘고 말고..."

아부성 발언이긴 했지만, 사실 내 눈에도

엄마가 참 이쁘게 보였다.

예전엔  엄마가 이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울 엄마는 이상하게 늙을수록 폼이 난다. 

연세가 80이나 됐는데도 주름살도 별로 없지,

표정도 밝지, 명랑한 편이지, 목소리도 젊지, 

 의식도 젊지, 뭐든지 배우려 하지...

정말 이쁘다고 추켜드리자, 엄마는 꼭꼭 숨겼던 얘기들을

풀어 놓기 시작했다..

 

"언제가 전철을 탔는데 말이다, 맞은 편에  앉은 웬 영감이

윙크를 하지 않겠니?

처음엔 내 옆에 누가 있나 하고 주위를 살폈는데,

주위엔 나 밖에 없는 거야. 나참 살다 별꼴을 다 본다 싶더라."

나는 물었다.

"엄마, 그 영감탱이 몇 살이나 돼 보였어요?" 

"잘 돼야 70 됐겠나 싶은데,  허우대는 멀쑥하더구나." 

나는 혼자 낄낄 웃었다. 그러니까 10살 쯤이나

연하남이 울엄니에게 반했다 이말 아닌가.

엄마는, "원 별 영감탱이를 다 봤다" 하면서도,

그닥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엄마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내가 버스나 전철 타면 말이다,

여자들이 내 머리를 보고

감탄을 해요. 할머닌 어쩌면

그렇게 머리가  멋있게

세었냐고  묻는데, 어떤 사람은 날보고

흰 염색을 한거라고

우기기도 하질 뭐냐. 얼굴엔 주름이 별로 없는데,

머리만 하얀 걸 보니 염색을 했다고 하는 거야. "

 

나는 또 맞장구를 쳐드렸다.

"엄마가 검은 염색하면 아마 60대로도 볼 거야.

엄마  머린 정말 멋있어. 우리 엄만 어떻게 늙을수록

이쁘고 멋있어지지? "

엄마는 내친 김에 보따리를 마저 다 터신다.

"하긴 날보고 성형을 했냐는둥,

60대면서 80이라고 거짓말 한다는 이도 있더라."  

엄마는 내가 으쌰 으쌰, 하자 신이 나셨다.

여자는 나이가 몇이든 여자로 머무는가보다.

허나 그런 얘긴 딸인 내게만 털어 놓는 얘기임을 

나는 잘 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울 엄니 이쁘다고

칭찬을 하여, 그 기를 받아 엄마가 조금만

건강해지셨으면 싶다.

 

엄마는 실컨 당신 자랑(?)을 하고 난 뒤,

"난 이제 아무 것도, 욕심나는 것도,

바라는 것도 없단다. 살 만큼 살았지..."

하신다.

방금 전의 자랑이 무색할 만큼

차분하고 체념어린 음성이다.  

엄마의 이야기는 늘상 이런 식으로

마침표가 찍어진다. 

그럴  때의 엄마 눈빛은 괜스레 해보는 말이 아닌,

정말로 삶에 대한 모든 끈을 놓으려 듯 보이기도 한다.  

촛불이 꺼지기전 잠시 반짝하듯,

방금 전 엄마의 상기된 음성 역시도 그런 게

아닐까 싶어, 한 순간 내 가슴은 철렁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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