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스크랩] 밥상 맡에서/ 민 혜

tlsdkssk 2005. 8. 30. 04:13
 

99년 10월27일



                                 밥상 맡에서




   정갈한 밥상을 방에 내려놓는 순간, 시어머님은 상을 번쩍 들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셨다. 일껏 차려낸 밥상이다. 나는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어머니, 왜 그러시는데요?”

  여쭈어도 묵묵부답.

  “어머니, 뭐가 잘못 됐나요?”

  거듭 여쭤 봐도 어머니 표정엔 왠지 노기만 등등하다. 나는 안절부절 못하면서 눈치만 살폈다. 더 이상 말꼬리를 이었다간 왠지 대접이라도 날아올 것만 같았다. 한 번 더 여쭙고 싶은 걸 입술을 잘근잘근 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대체 뭘 잘못한 거지? 거푸 자신에게 물었지만 지피는 게 없었다. 살림 초보이긴 해도 반찬이라면 그다지 꿀리지 않는 나였다. 게다가 맛깔스레 보이라고 음식의 색상 배합까지 염두에 두며 담아내지 않았던가. 사발에 무지막지하게 밥을 퍼 담은 것도 아니고, 먹다 남은 반찬을 그대로 되 올린 것도 아니고, 김치 종지 가장자리를 엄지손가락으로 말끔히 닦는 것도 물론 잊지 않았고 말이다. 

 

 

  찬바람이 쌩쌩 이는 어머니의 등 뒤에서 나는 나대로 씨근거리는 숨을 달래고 있었다. 밥상을 부엌에 내려놓은 어머니는 찬기를 열더니 내가 담아 온 반찬들을 하나하나 뒤엎기 시작했다. 뒤이어 당신 손으로 듬뿍듬뿍 되 담는 것이었다.

  저거였구나! 어머님 세대와 내 정서의 차이를 나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다. 그제사 머리를 끄덕였지만 속에선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원 노인네 성미하고는. 다음부턴 수북수북 담으라 해도 될 걸 이렇게 화를 내실 건 뭐람.’

 

   다시 밥상을 들고 가려 하지 어머니는 밥상을 가로채며 “그런 조막손으로 뭘 한다고…?” 하신다. 나도 더 이상 참지 않고 어머니 등에 대고 볼멘소리로 종알거렸다.      

  “어머니, 저는요, 예쁘게 보이라고 일부러 조금씩 담아냈던 거예요. 왜, 일식집 같은데 가보면 큰 접시에 조금씩 담아내오지 않아요? 그럼 같은 음식도 훨씬 고급스럽게 보이구요.”

 

  씨도 먹히지 않는다는 듯 어머니는 묵묵히 진지만 드셨다. 그날 시어머님과 함께 먹은 점심은 참으로 쓰디썼다. 서운함이 쉽게 가시질 않았다. ‘홀시어머니 힘들다더니….’ 나는 연신 속으로 홀시어미 탓만 하고, 어머님은 “그 가느다란 팔때기로 빨랜들 제대로 하겠니?” 했다.


 

  그로부터 사반세기 지난 오늘, 나는 참으로 쓰디쓴 저녁상을 홀로 대하고 있다. 이사 후유증인지 통 식욕을 모르고 지낸다. 식구라도 북적대면 찬이라도 넉넉하련만 아들은 학교 갔다 자정께가 다 돼서야 들어오고, 남편은 지방으로 떠났으니 혼자 먹는 밥상은 그야말로 궁색하기 짝이 없다. 피로가 겹치다 보니 내 한 입 먹겠다고 상 차리는 일이 정말로 귀찮다. 그래도 가족들이 있었다면 젖 먹던 기운까지 보태 밥상을 차렸을 테고, 그 덕에 나 또한 제대로 된 밥상을 대했을 게다. 새삼 사람 ‘人’의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깨작깨작 찬 없는 밥술을 뜨는데, 문득 시어머님 얼굴이 다가온다. 어느새 내가 그 연배에 와 있질 않나. 차이라면 남편 자식 건재한 나와 달리 당신은 오랜 세월 지아비도 없는 밥상을 삼시 세끼 홀로 대했던 것일 뿐이다.

  아들 하나 달랑 낳곤 배짱 좋게 단산한 내게, 속 모르는 어머니는 아이를 더 나으라 재촉하시곤 했다. 남편이 당신 배 아파 낳은 자식이 아니라는 비밀을 밝힌 후론 평생 우리 집에 머물기를 고사하신 어머니였다. 당신의 자존감을 받쳐주지 않는 생활로 주위 사람을 자주 힘들게 하셨지만, 본디는 사람을 반기고 잔정이 많은 분이다. 그래 선가, 새댁 시절엔 그리도 무섭던 어머님이 나중엔 귀여운 여인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며느리가 된 뒤론 나는 이따금

 “우리 어머닌 참 귀여운 데가 있으시단 말야...”

 하고 농담까지 건네기도 하였다. 어머닌 버릇없는 며느리의 농담을 은근히 즐기시는 듯 했다. 

 

  밥을 먹다 말고 나는 돌연 무릎을 쳤다. 맞아, 그 때 어머니는 일식집을 몰라서가 아니었을 게다. 외아들마저 곁을 떠난 외로움, 홀로 대하는 나날의 밥상이 쓸쓸했던 거겠지. 불현듯 가족의 훈김이 사무치게 그리웠던 거겠지. 이제 집안에 한 식구가 늘었거늘, 모처럼 새 며느리와 푸짐하고 오붓한 겸상을 하고 싶었던 거겠지. 오직 그 일념으로 오척단신 종종 걸음으로 달려오셨거늘 차려 낸 밥상이 그 모양이었으니….

  깔끄럽던 밥알이 그예 목에 걸리고 만다.

출처 : 밥상 맡에서/ 민 혜
글쓴이 : 투명 첼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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