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스크랩] 도둑고양이 미루

tlsdkssk 2005. 8. 26. 23:59
 

05, 5월 31일



                            도둑고양이 미루


                                                         민 혜


  간밤에 고양이 새끼 하나가 품으로 들어 왔다.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듬성듬성한 것이 꼭 작은 젖소를 보는 듯 했다. 우리 동네엔 웬 독립고양이(도둑괭이)가 그리도 많담. 암고양이 배가 풍선만큼 불러왔나 하면 어느 새 바람이 빠져 기와지붕에서 새끼들과 노니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럴 때 마다 한 마리만 길렀으면 했지만 그림의 떡이었다. 도둑고양이는 동네 쓰레기통을 기웃거릴망정 시건방진 구석이 있어 좀처럼 친하기가 어렵다.


  몇 해 전에도 늘 우리 마당을 서성이는 고양이가 있었다. 2년 여 먹이를 주며 친해보려 했지만, 녀석은 끝내 2m 이내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았다.

  “이젠 올 때도 됐잖니? 괜찮아, 어서 와 먹고 가.”

  이만하면 됐다싶어 말을 걸면, 녀석은 어림없다는 듯 특유의 도도한 눈빛을 보내곤 슬그머니 꽁무니를 감춘다. 그러고는 내가 보지 않을 때 낼름 먹이를 채가는 거였다. 곁을 안 주기는 하루 고양이도 마찬가지. 어쩌다 어미 잃고 우는 새끼가 있어 가까이 다가서면 놈은 괭이 만난 쥐새끼처럼 토낀다. 까짓 놈 하나 못 잡으랴 싶지만 바람 같이 빠른 놈을 당할 재간이 없었다.


  한데 어제 그 녀석은 순순히 따라오지 않는가. 고양이를 기른 경험이 많은지라 나는 놈을 다루는 데는 선수다. 손가락 몇 개만으로 놈을 화나게 하고 공포에 젖게 하는가 하면, 녀석의 장난기를 불러일으키고 황홀경으로 빠뜨릴 줄도 안다.

  밤새 녀석과 수작을 즐기다 참치 캔을 뜯어 주었다. 놈은 맛나게 먹으며 내게 애첩 기생처럼 답싹 안긴다. 사람에게 이렇게 잘 안기는 도둑괭이도 있네. 기뻐 어쩔 줄을 모르며 녀석에게 ‘미루’란 이름까지 지어 주었다. 어린 시절에 ‘도루’란 개를 키워보긴 했어도 한번도 생각지 못한 ‘미루’란 이름이 어떻게 튀어나왔는지 모르겠다.


  개라면 껌뻑 하면서도 선뜻 기르지 못하는 게 놈의 넘치는 정 탓이라면,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 소위 ‘쿨’한 녀석의 기질 때문이다. 사람에게 집착하지 않으니 사정상 떼어내도 상처를 적게 받는다. 야성이란 비장의 무기로 곧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기에 나는 진작부터 부담을 덜 수 있다. 감정에 ‘오버’가 없고 현재가 전부인 양 사는 녀석, 만사는 변하기 마련이란 걸 이미 꿰고 사는 녀석 같다.

  그리고 또 하나, 녀석의 고혹적인 눈빛을 빼놓을 수 없다. ‘마노’ 같은 녀석의 눈 속엔 바닥 모를 심연이 숨어있다. 빛의 강약 따라 침(針)으로, 흑 구슬로 자유자재 변하는 녀석의  도발에 나는 번번이 긴장하고 흥분하다 마침내 침몰한다.

  놈은 파격의 명수이자 조율의 달인, 강약과 농담(濃淡)을 때맞추어 잘도 구사한다. 오장육부 다 빼주다가도 때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몸을 세워 야행 길에 나선다. 사람 손에 길러지다가도 심사가 변하면 맨몸으로 가출도 하는 녀석이니 거칠 것 없는 자유주의자다.      


    근래 애인의 변심으로 속을 끓이는 한 여성이 있다. 그 맘이 오죽할까만, 그렇기에 그녀에게 고양이를 안겨주고 싶었다.

  ‘고양이를 보라구. 맺고 끊기를 잘 하지. 간이라도 다 빼줄 듯 하다가도 돌아서면 그뿐, 가을 부채(秋扇)처럼 버려져도 그뿐, 오뚝이처럼 홀로서기를 하지.’

  그러던 차에 굴러온 고양이라니.

  “미루, 미루, 이리와.”

  새벽녘이 되도록 녀석과 노니는데, 어느 순간 미루가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숨었나 이름을 부르는데, 이런, 허망할 데가…. 내 손을 핥던 사포 같은 혓바닥과 몰캉거리는 몸뚱이, 작은 엔진처럼 그르렁대던 숨소리와 청회색 눈동자…. 녀석의 모든 게 이렇듯 선연한데 나는 이불 속에 반듯이 누워 있지 않은가.


  나는 아쉬움에 혼잣말을 해야 했다. 그러면 그렇지, 선뜻 왔다면 넌 고양이가 아니지. 잘 가렴, 미루. 아무에게도 가지 말고 언제나 너대로 그렇게…….



출처 : 도둑고양이 미루
글쓴이 : 순호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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