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스크랩] 예외적 인간

tlsdkssk 2005. 8. 26. 23:50
 

05년 6월 8일



                          예외적 인간



  즐겨 읽는 것 중에 <생활의 발견>이란 책이 있다. 책이란 거의가 일회적 만남으로 끝나게 마련이다. 따라서 같은 걸 두 번 읽는다는 건 좀처럼 힘든데도 이 책만은 무시로 펼치곤 한다. 소설처럼 연이어 지는 게 아니니 아무 페이지나 넘겨도 좋고, 이견이 있을 땐 임어당과 무언의 토론을 해보는 재미도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책을 읽을 때면 나는 늘 연필을 한 손에 쥐고 밑줄 그을 준비부터 하는 버릇이 있다. 문학성, 잔재미성, 사회성, 철학성, 상식성… 이렇게 구미 당기는 요인이 많으니 늘 준비를 할 수 밖에. 한데 진종일 낚시대를 걸고 있어도 피라미 한 마리 못 잡는 날은 몹시도 허전하다. 반면 읽을수록 감칠맛이 나서 몇 번이고 읽는 책이 있는데, <생활의 발견>은 단연 후자에 속한다.

 

  그런 이유로 그 책은 매우 지저분하다. 연필로 긋고, 볼펜으로 긋고, 형광펜으로 긋고, ☆표를 하고, ∨표를 하고….  

  오늘 우연히 펼친 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만일 단종(斷種)이라는 걸 나라의 정책으로 행한다면,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사람, 미적 감각이 썩어빠진 사람, 정감이 우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 냉혹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사람,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냉혈한, 또는 세상 살아가는데 아무런 흥취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우선 단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빙그레 웃음이 난다. 이 대목엔 자그만치 네 가지 표시가 되어 있다. 연필, 볼펜, 형광펜…. 그중에서도 ‘미적 감각이 썩어빠진 사람’이란 구절엔 굵은 밑줄과 ☆까지 표시되어 있다. 다른 구절이야 누구라도 말할 수 있지만, 미적 감각에 대한 대목만큼은 임어당다운 촌철살인의 명구라고 여긴 까닭일 게다. 무절제한 자연 개발, 도시 미관을 해치는 간판과 건축물, 유명 사찰 부근에 늘어선 천박한 상가… 이런 것들을 볼 때마다 나는 임어당의 그 구절이 절로 생각나곤 했다. 

   다른 자질은 다 갖추었으되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를 좋아할 수는 있어도 사랑하지는 못할 것 같다. 이제껏 내가 사랑한 사람들은 일단 미적 감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잠시 T시에 머물 때의 일이다. 재충전을 한다고 그 지역 모 대학의 평생교육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내가 등록한 논술반의 강사는 국어교육학과 교수님인데, 처음 뵙는 순간 그만 맥이 빠지고 말았다. 깡마르고 작은 키에 무말랭이 같은 얼굴, 이따금씩 눈을 꿈적꿈적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답답증을 일으키는 교수님의 짝짝이 눈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문제가 된 건 옷차림. 안타깝게도 교수님의 양복과 와이셔츠와 넥타이가 전혀 하모니를 이루지 못한 채 제각각 따로 놀고 있었던 거다.


  첫 만남인데 어찌 그리 무심하게 나오셨나 싶었지만, 교수님의 의상 코디네이션은 갈수록 점입가경이다. 어느 날은 숫제 후즐그레한 점퍼에 색깔도 엉뚱한 넥타이를 매고 나오신 게 아닌가. 수강생들은 킥킥대며 복덕방 할아버지 같다고 수근거렸다. 그럼에도 강의가 무르익을수록 우리들은 시나브로 그 교수님께 빠져들기 시작했다. 해박한 지식과 차가운 지성, 거기에 배꼽을 쥐게 하는 유머 감각과 인품의 따듯함이 심포니처럼 어우러져 우리를 감동시킨 까닭이다.

 

  칼 같은 꾸중도 구수하게 포장하여 내놓는 달변에 반해선가 1년이 다갈 무렵엔  ‘××× 교주님’이라 부를 만큼 우린 교수님께 깊이 매료되었다. 게 중 몇 사람은 내게 은근히 교수님에 대한 연정을 고백하기도 했다. 교수님 같은 분을 남성 친구로 둔다면 삶의 윤기가 돌 거라는 얘기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여성이라면 거의가 동의할 일이었다. 나도 T시에 머물며 가장 복된 일로 그 교수님과의 만남을 꼽았으니까.


  한데 그 중 한 여성은 수업 중에도 교수님께 공개적 구애(求愛)를 하는 등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 여성의 ‘대시’와 교수님의 능란한 방어를 보는 건 또 하나의 즐거움이었다. 마침내 강의가 다 끝나고 종강 파티를 하는 시간이 왔다. 그녀는 강의가 끝나면 교수님이 무 자르듯 강의실을 떠난다는 것, 수강생들과 회식도 사양한다는 것, 연구실엔 절대 여성 혼자 출입하지 못한다는 걸 알고는 마지막 공개 고백을 해왔다. 교수님 생각이 자꾸만 난다는 둥 사모한다는 둥…. 그에 대한 교수님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 고맙습니다. 그런데 제 사춘기는 5년 전에 이미 끝났습니다.”

  강의실엔 폭소가 터졌고, 웃음이 잦아들 무렵 교수님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교수님을 만난 이후, 나는 임어당의 그 글귀를 읽을 때마다 전에 없는 진통을 겪는다. 그 교수님같이 미적 감각이 썩어빠진(?) 인간은 어떡하면 좋겠는가 하는 것. 아무래도 그 분만은 예외적 인간으로 넣어야 할 듯.  삶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출처 : 예외적 인간
글쓴이 : 순호박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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