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어머니의 불

tlsdkssk 2021. 6. 20. 06:29

53년 엄마의 일기 '어머니의 불'이 지금 인쇄중이다.

지난 해 2월부터 1년 여 작업한 이 원고를 탈고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코로나 덕이었다.

손녀가 생기고부터 내가 언제 지난 해와 같은 느긋한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항공사 승무원인 며느리의 직업으로 내 집과 아들네를 오가느라 나는 아무 것도 계획할 수 없는 일상을 보내야 했다.

누구와의  약속도 원하는 날을 미리 정해 잡을 수 없었고 재충전을 위해 뭔가를 배우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승무원 일이란 매달 근무 일정이 바뀌고 근무 일자를 미리 알 수도 없는 데다가

이따금 근무에 변동이 생기는 바람에  서울을 벗어나 마음 놓고 여행하기도 어려웠다.

비대면이 권장되었던 지난 1년간 집콕하며 53년간 쓰신 친정 엄마의 일기를 읽었다.

읽는 동안 나는 두 번의 인생을 사는 듯 했다.

나는 다시 초딩 시절로 가야했고, 쌀이 떨어진 슬픔을 겪어야 했고 중학생이 되었으며

반항적 사춘기를 거치고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아야 했다.

기록을 남긴다는 건 사라져버린 삶의 궤적을 다시 소환하여 기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똑같은 명작 소설을 읽어도 십대와 삼십대와 육십대의 느낌이 다르듯

엄마의 기록을 통해 내 인생을 덤으로 돌아보는 소회 또한 그러하였다. 

일기 행간에 드문드문 적어 낸 나의 단상은 내 삶의 황혼기에 기록한 것인만큼  해석이 치우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도 이젠 인생을 살아볼 만큼 살아 본 시점에 와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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