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달라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성 중 성모 마리아 다음으로 자주 등장하는 성인이다. 성경에서 막달라 마리아라고 명시된 구절은 3번 등장한다. 예수 덕분에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십자가 아래에서 예수의 죽음을 지켜본 막달라 마리아, 부활한 예수를 처음으로 본 막달라 마리아 등 세 구절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는데도 이후 막달라 마리아는 성경 속에서 자취를 감춘다. 그녀는 어디로 간 것일까?
막달라 마리아는 남성 제자 공동체 안에서 ‘왕따’ 신세였다. 특히 베드로는 막달라 마리아를 드러내놓고 적대했다. 이렇게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으니, 예수의 죽음 이후 막달라 마리아가 철저히 배제된 건 당연한 수순 아니었을까. 이때부터 막달라 마리아는 교회 안에서 얼마든지 후려쳐도 되는 대상이 되었다.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 부활의 첫 증인이었고 다른 남성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알린 메신저였다는 것도 못마땅한 사실이었다. ‘왜 예수는 자신이 부활한 모습을 여인에게 처음으로 보여야만 했는가’ 하는 문제는 항상 신학자들을 괴롭히는 골칫거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한 가장 기발한 설명은 아마 중세시대에 진지하게 제기된 다음과 같은 주장 아니었을까. “소식을 퍼뜨리는 가장 빠른 방법은 여자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에 더해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라는 이름까지 얻기도 했다. 그가 성판매 여성으로 인식되게 된 계기는 따로 있다. 시작은 591년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였다. 그가 루가복음 7장에 등장하는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죄지은 여자’를 막달라 마리아로 해석해 그녀를 ‘회개한 창녀’로 설교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향유 부은 여성을 ‘죄지은 여자’라고만 말했을 뿐 성판매 여성이었다는 근거는 없었다.
하지만 때는 중세 말. 성적인 죄는 모두 여자에게 씌워지던 시대였기에, 막달라 마리아의 죄는 손쉽게 성을 파는 여성으로 치부됐다. 나중엔 아예 요한복음 8장에 등장하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마저도 막달라 마리아와 동일 인물로 해석됐다. 즉 막달라 마리아는 신학적으로 마음대로 채울 수 있는 ‘무형의 빈 공간’(null)이었다.
쥘 르페브르가 그린 <동굴 속의 막달라 마리아>는 이런 배경 아래 탄생한 그림이다. 예수 부활의 증언자이자 성경 속 영웅을 이렇게 성적인 존재로 표현한 것은 그녀의 권위를 부정하는 한 방법으로 볼 수 있다.
막달라 마리아의 진짜 모습을 그린 이는 표정을 일그러트린 채 통곡하는 ‘신실한 제자’로 표현한 이탈리아의 화가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일 것이다. 에르콜레 데 로베르티가 그린 <울고 있는 막달라 마리아(사진)>는 소실된 벽화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일부로 추측되는 작품이다.
교회가 막달라 마리아의 본모습을 바로잡은 것은 20세기가 되어서였다. 1969년에야 가톨릭교회는 그레고리우스 1세의 설교에 실수가 있었음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철회했다. 그러나 여전히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였으나 회개해 성녀가 된 여자로 일반적으로 지칭되곤 한다. 교회 안에서 여성의 권한을 제한하고 남성에게만 사도적 권위를 부여한 정통파 교부들이 승리한 증거다. 막달라 마리아의 자리는 그렇게 효과적으로 ‘도둑질’당했다.
올해는 영국의 여성 과학자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막달라 마리아에게 드리워졌던 그림자가 프랭클린에게도 있었다. 프랭클린은 디엔에이(DNA)의 구조가 이중나선형이라는 사실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과학자였다. 하지만 프랭클린은 연구 업적을 도둑질당했다. 프랭클린은 디엔에이 샘플을 추출해 실험을 하던 중 디엔에이가 이중나선 구조임을 보여주는 ‘51번 사진’을 엑스(X)선으로 촬영했는데, 프랭클린과 함께 연구하던 모리스 윌킨스가 그녀 몰래 이를 빼낸 것이다.
윌킨스는 사진을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이라는 과학자에게 건넸고, 그들은 프랭클린의 51번 사진을 근거로 디엔에이 구조가 이중나선형이라는 내용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20세기 유전학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으로 평가되었고 왓슨과 크릭, 윌킨스는 이 논문으로 노벨 생리의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렇다면 프랭클린은? 디엔에이 사진을 찍느라 엑스선에 자주 노출돼 안타깝게도 그 전에 숨졌다.
마치 막달라 마리아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주류 남성 교회가 그녀를 “창녀 출신”이라고 거짓으로 헐뜯은 것과 쌍둥이처럼 똑같은 대응이다. 도둑질의 역사는 여전히 질기게 살아 있다. 어느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한겨레신문, 이유리의 그림 속 권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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