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화와 관련된 조각이나 미술작품을 보면 누드로 표현된 작품이 많다. 그것은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있는데, 자세히 보면 하나의 공통된 흐름이 있다. 먼저 그 대상이다. 올림포스의 신들 중에서도 제우스나 헤라, 데메테르와 같은 어버이 측에 드는 신들의 누드를 보기는 힘들다. 그들을 표현하자면 어느 정도 나이든 모습으로 표현을 해야겠는데, 누드는 그 모습으로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보다 훨씬 전에 신화가 신앙으로서 믿어졌을 때는, 감히 위대한 대신의 모습을 벗겨야한다는 상상을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서 아폴론이나 헤르메스, 아프로디테, 에로스 같은 신들의 누드 모습은 많이 있다. 이들은 모두 젊고 아름다운 신들이었다. 화가들이나 조각가들은 아름다움을 더욱 정교하게 표현하기 위해 옷을 거추장한 것으로 인식하고 이를 제거했던 것 같다.
이것은 신화속에서 옷들이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신들을 상징하기 위해 다양한 무기나, 새, 나무와 같은 것들이 그림이나 조각에서 곁들어졌지만, 옷은 그런 상징적인 의미를 거의 지니지 못한다. 예를 들어 그 겉모습이 매우 비슷한 제우스와 포세이돈을 구별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손에 무엇이 들려져 있는가를 살펴보지, 그들이 입고 있는 옷을 쳐다보지는 않는다. 손에 번개가 있다면 제우스이고, 삼지창이 있다면 포세이돈이다. 만약 이 두 신이 무기를 서로 바꾸어 잡고 있다면, 우리에게는 약간의 혼동이 생길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남성과 여성의 행동이다. 즉 남성은 활동적인 어떤 모습이거나 어떤 곳를 지시하며 바라보는 모습이 많다. 이에 반해 여성은 수줍어 하는 모습이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피하고 있는 모습이다. 또는 무엇인가 쳐다보고 있지만, 그것은 수줍음에서 나오는 행동처럼 보인다. 물론 아르테미스 같은 사냥의 여신의 모습은 활동적인 모습으로도 많이 나타난다.
이주헌님의 <신화, 그림으로 읽기>에서는 이러한 것들을 설명함과 아울러 누드예술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다. 즉 고대에는 주로 남성만을 모델로 삼았고, 여성의 몸은 '불완전한 몸'으로 인식되어 표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본격적인 여성 누드가 등장한 것은 고전기의 말기이자 헬레니즘 시대가 열린 기원전 4세기경'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성 누드가 유행할 때에도 (지금도 그렇겠지만) 그 몸을 '불완전한 몸'으로 인식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에로티시즘의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하나의 관행에서도 남성우월주의 사상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 서양미술을 보고 또 서양미술을 통해 그리스의 정신, 나아가 서양문명의 정신을 살펴본 신화예술 감상서. 서양미술이 왜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적인 미술로 발달하게 되었는가에 초점을 맞춰 우리하고는 매우 다른 이 전통이 그리스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신화그림을 사례로 들어 설명했다. 또한 그렇게 형성된 서양의 사실적 미술 중 신화를 소재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신과 영웅들을 소개했으며, 신화의 전통에 따라 발달한 우의와 상징 등 서양미술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그리스에 대한 동경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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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이 남성 누드를 즐겨 표현한 것은 그리스 남성들이 스포츠 경기를 벌일 때 벌거벗고 운동을 하는 등 남성의 나체를 볼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있다. 단편적으로는 이 같은 지적이 옳을지 모르지만 충분한 답변이 되지는 못한다. 그리스인들이 남성 누드를 애써 표현한 것은, 세계의 중심은 인간이라는 휴머니즘 사상과, 진정한 문명인은 이성적 사유의 가치를 이해하는 그리스인뿐이라는 그리스인 중심적 사고, 완전한 인간은 성인 남성뿐이라는 남성 중심적인 사고의 복합적 산물이다. 우주가 낳은 가장 완벽한 존재를 '있는 그대로 (사실은 이상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철저한 그리스 시민 혹은 그리스 신을 형상화한 남성 누드가 정착되었다. 이렇게 제작된 그리스의 조각은 대부분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공공장소에 설치되어 폴리스의 이상과 통합을 상징하는 기능을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누드상을 통해 그리스 남성은 여성·미성년·노예 그리고 야만인(비그리스인)과 '육체적으로' 혹은 시각적으로 구별되는 완전한 인간의 표상이 됐다. 우리가 '슈퍼 모델' 같은 여성을 가리켜 '8등신 미인'이라고 인체의 미적 비례를 곧잘 거론하지만, 7등신이든 8등신이든 그리스 예술가들이 여자의 인체를 토대로 미적 규범을 논했다는 기록은 아직 발견된 것이 없다. 여성은 '불완전한 남성' 또는 '거세된 남성'으로, 사회적으로나 미학적으로 열등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8등신 미인'은 후대에 생겨난 관념임을 알 수 있다.
그리스인들이 남성의 인체에서 비례나 대칭 등 수학적 질서를 찾은 이유는 남성만의 만물의 척도였기 때문이다. 이러다 보니 그리스 남성들은 한 시인의 표현마따나 "신 앞에 맹세코 말하노니 나는 머리에 왕관을 쓰는 것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갖기를 더 바라노라"라는 소원을 잠꼬대처럼 반복했던 것이다. 여기서 아름다움은 오늘날의 '여성적 아름다움'과 다르다. 그것은 우월자, 지배자로서의 아름다움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누드는 곧 '권위의 옷'이다. 그 옷은 늘 사람들에게 존경과 부러움, 찬탄의 시선을 이끌어냈다.
이에 반해 여자가 벗는다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불완전한 몸'을 노출하는 행위는 부끄러움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헬레니즘 이전 그리스의 여성조각 가운데 몸의 일부라도 노출된 경우에는 겁탈이나 기타 공격을 당하는 장면인 경우가 많았다. 남성들이 입혀주는 '문화의 옷'을 입고 있을 때, 그들은 비로소 결점을 보완할 수 있었고 일신의 안전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 문화에서도, 비록 소변이 옷이 젖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남자아이는 아랫도리를 벗겨놓으면서도 여자아이에게는 그렇게 하지 않는 관습은 이런 관념과 연관이 있다 하겠다.
그러나 그리스 예술가들은 여성을 표현하고 관찰하는 와중에 여성의 몸이 '불완전한 남성'이 아님을 곧 깨달았다.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완벽한 아름다움이 있음을 갈수록 선명히 느꼈다. (중략) 르네상스 이후 남성 누드는 시간이 갈수록 그 수효가 급격히 줄어든 반면, 여성 누드는 급격히 증가했다. 그렇다면 여성이 이제 우주의 중심, 인간의 대표가 된 것일까? 물론, 주지하듯, 그렇지는 않았다. 여성의 아름다움을 남성의 아름다움과 대등하게 (때론 좀더 우월하게) 바라보게 된 미술 쪽의 시각과 달리, 사회적으로, 심지어 의학적으로도 여성은 여전히 '불완전한 남성' 취급을 받았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서구에서는 여성의 신체를 생물학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남성이 되지 못한', '미완의' 인체로 보았다. 한마디로 여성은 '하위의 성'일 뿐이었다. 변한 것은 여성미의 독자성을 발견한 미술이 이를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관계로, 아니 여성 누드가 지닌 힘의 폭발성을 갈수록 강력하게 느꼈기 때문에, 누드 미술을 주체를 표현하는 미술에서 객체를 표현하는 미술로 변형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성이 스스로를 찬양하는 미술로서의 누드 미술을 남성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미술로서의 누드 미술로 바꿔 버린 것이다. 물론 모든 여성 누드가 에로티시즘의 목적을 띠고 있지는 않다. 특히 중세의 누드는 순수함이나 헐벗음, 죄, 진실 등 다양한 상징성을 지녔고, 이 전통은 후대에도 어느 정도 이어져 내려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에로티시즘은 여성 누드의 가장 중요한 본령이 됐다.
이 같은 사실은 미술 속의 여성 누드가 취하고 있는 포즈를 추적해보면 금방 드러난다. 그들은 그리스의 남자 누드처럼 '시선을 던지는 자'가 아니라, '시선을 받는 자'이다. 그들은 '자기를 의식하는 자'가 아니라 '남을 의식하는 자'이다. 그들은 주체가 아니라 객체이다. 여성 누드는 늘 관자에게 복종한다. 그들의 자세와 표정은 관자를 위한 것이다.
이주헌 <신화, 그림으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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