냄비에 대한 반론
시인 조영란
사랑이 아니어서 외롭고
사랑이어서 외로우므로 우리는 식을 수밖에 없다
끓어오르다 서둘러 저무는 본성 탓이 아니다
요람이자 무덤인 한 세계에서
한통속이 된다는 건 은밀하고 충분히 즐거운 일
너는 끓고 나도 들썩였지만 우리는 넘치지 못했다
우리가 태워버린 것은 서로의 슬픔,
눌어붙은 체념은 명치에 검은 지문을 남겼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별은 어디에나 있다
가능과 불가능 사이
곁이었으나 곁이 될 수 없었던 결벽의 벽 앞에서
우리가 한 일은
가슴속 사나운 짐승 한 마리 달래어 집으로 돌려보낸 것*
뜨거움이 빠져나간 서늘한 절제와
기약할 약속이 없어 더 단단해지는 결속,
그게 우리의 사랑이다
슬픔으로 그을린 가슴 언저리에 불씨 한 점 살아난다
식는 건 쉽지만
다시 달아오르는 걸 막을 수는 없다
식은 만큼 뜨거워지고
멀어진 만큼 가까워지는 그것 또한 우리의 사랑이다
그러니 통속적인 하루처럼 자신을 사랑할 것
그래야 뜨겁게 식을 수 있으므로
* 조정인의 「날개에 바치다」에서 변용.
ㅡ시집『시인동네』(2017, 1월호)
시류에 휩쓸리지 않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고유한 시세계를 펼쳐온 조정인 시인의 두번째 시집이다. 신성을 지향하는 삶과 인간의 존재론에 대한 깊은 성찰을 감각적이고 예리한 언어로 형상화한 시편들이 담겨 있다. 풍요롭고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빚어낸 정교한 묘사와 산뜻한 이미지가 돋보인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2011년 5월4일(수)
지 난 1988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한 후 휩쓸리지 않는 자신만의 어법으로 고유한 시세계를 펼쳐온 조정인의 두 번째 시집 『장미의 내용』. 첫 시집 발표 이후 7년 만에 펴낸 이번 시집은 온몸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시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저자의 진정성이 담겨있다. ‘사과’ 한 알을 통해 신성의 세계로 들어가 과거와 현재, 기억과 상상, 현실과 비현실을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넘나든다. 정교한 묘사와 산뜻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조정인 시인은 “자신의 관성으로 인간과 인간, 사물과 사물을 관통하”(「숲」)는 신성의 세계를 꿈꾼다. 그가 이 시집에서 중심시어로 삼고 있는 ‘사과’ 한 알 속에는 신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무궁무진한 비의가 담겨 있다. “고물대는 우주를 물고 있”고 “지나간/시간의 질감이 역력히 남”아 있는 이 사과에는 “알 수 없는 흔적들이 지워질 듯 어른거”(「홍옥」)린다.
에덴의 기억을 환기하는 “하느님의 붉은 혁명”을 상징하면서 “태아들의 따뜻한 머리통 같은, 지구의 뇌관 같은”(「서쪽을 불러들이다」) 이 사과의 향기가 진동하는 곳은 다름아닌 지금-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다. 이 삶의 현장에서 시공을 초월하며 타자들과 접속하는 시인은 “종(種)의 경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고양이는 간간 상황 너머에 있다」) 실감하며 우리 삶의 현장을 “영(靈)의 통일성이 점유하는 세계”로 인식한다.
신성이 이룩한 이 세계에서 시인은 “불현듯 눈이 멀어 전신이 눈이 되는, 신성의 얼굴과 마주한 백열상태”(「숲」)를 경험한다. 그래서 그는 “영혼의 어떤 거리는 여전히 비어 있”(「날개에 바치다」)고 “신의 꿈속”(「초신성」)일지도 모르는 세상에서 “심장이 사라”진 “흰 늑대가 되어 하늘 복판을 펄럭”(「장미의 내용」)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고자 한다.
이제 시인은 쉽게 규정할 수 없는 자신의 실체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 신성을 지향하는 여성성을 앞세워 타자에 대한 사랑으로 나아간다(김수이 「해설」). 중세의 시민광장에서 화형당하는 마녀(「불꽃에 관한 한 인상」), “사람들 사이 개펄에 던져져 실종된 밧줄 같은”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장애인들(「느리게 흐르는 책」), “지구의 어느 곤고한 시절/참 비정한 세월에게서 버림받아 굶어죽은” 혼령들(「눈보라는 어디에 잠드나」), 천년 전 나라에 전란이 있던 해 바위섬에 깃들어 살던 부부(「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자신을 납치한 무장혁명군의 간부와 사랑에 빠져 정글에서 아이를 낳은 꼴롬비아의 여성 변호사(「한 장 모포」) 등, 시공간을 넘나들며 무수한 타자들의 삶을 윤회한다.
조정인 시인의 시는 한 편 한 편 정성이 깃들어 있다. 머리나 가슴에 기대기보다는 온몸으로 밀고 나가며 끊임없이 자신의 시세계를 확장해나가는 진정성과 “어둠속에서 빛을 찾아내는”(조창환, 추천사) 경건한 시정신이 잔잔한 감동을 자아낸다.
■ 시인의 말
─어린왕자의 꽃…… 골목을 벗어나며 미처 말을 맺기도 전이었다. 2011년 4월 |
■ 추천의 글
그에 의해 호명되는 신생, 사물들의 탄생은 ‘비의적 밀도성’이라는 통과의례를 어김없이 치르고 있다. 그의 중심시어라고 할 수 있는 ‘사과’ 한 알 속에 그가 경작하는 상상력의 과원은 그래서 늘 예사롭지 않은 발견을 탄력적으로 밀어낸다. 그는 “몽상과 예감의 거친 파도가 쓸고 간 하늘 아래, 꿈처럼 재현된 과수원에서 사과를” 수확한다. 그 사과들은 “지상에 흘린 에덴의 풍문”이기도 하다. 화자는 그걸 “한입 베어물”고 “불온을 부추기는 균이 고요하게 번식해”가는 시의 발효, 탐미의 황홀을 즐긴다. 이러한 그의 두드러지는 시어의 운용구조는 명사의 동사화에 있다. 다시 말해 사물들의 운동 이미지, 그 형성을 통해 창의적 생산과정을 신선하게 열어 보이고 있다. 흘러가야 할 것은 ‘빗소리’이지만 그의 시에서는 그걸 듣는 ‘귀’가 흘러가게 하는 원초적 기능의 전치를 통해서 ‘빗소리’의 정체, 그 존재성을 초월적으로 확장한다.
ㅡ정진규 시인
조정인의 상상력은 풍요롭고 자유롭다. 사물과 사건의 미묘한 틈새에 자리잡은 존재의 울림과 흔들림을 포착하여 형상화하는 언어적 감각은 놀랍고도 신선한 충격을 준다. 조금 어둡지만 아주 캄캄하지는 않고 조금 환하지만 아주 가볍지는 않은 어스름한 경계선쯤에 위치한 그녀의 언어들은 칼날처럼 아름답고 성의(聖衣)처럼 깊은 맛이 있다. 조정인 시의 탁월성은, 그러나 이러한 언어적 감각이 빚어내는 기법상의 매력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독의 다른 이름은 하느님”이라든지 “창조와 피조를 동시에 견디는 중”이라는 시구에서 보이는 두터운 사색의 흔적은 그녀의 시에 견고한 중량감을 보태어준다. 그것은 성실하고 치열하게 어둠속에서 빛을 찾아내는 정신의 궤적이기도 하다.
ㅡ조창환 시인
■ 시인소개
조정인 시인
서울에서 출생. 1998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시집으로 『그리움이라는 짐승이 사는 움막』(천년의시작, 2004)과 『장미의 내용』(창비, 2011) 이 있음. 제2회 토지문학제 시부문 대상 수상.
☞ 목차
제1부
한 개의 붉은 사과/사과 따기/하느님의 오후/아내가 있었다/홍옥/목격/고양이는 간간 상황 너머에 있다/문신/자동기술/낙수/홍옥(紅玉)/탁발/조용한 일/고양이 물그릇에 손끝 담그기/고구마를 깎다
제2부
슬픔의 문수/날개에 바치다/어둠이 성의처럼 내려졌다/당신의 턱수염/사과의 감정/호젓한 간격/먼지야, 그때 너 왜 울었니?/장미의 내용/아무 일 없이/장미와 바람은 다 어떻게 보존되나/불꽃에 관한 한 인상/느리게 흐르는 책/성체/어머니의 나무주걱/연둣빛까지는 얼마나 먼가
제3부
안개/내 무릎 속 사과/서쪽을 불러들이다/난감/눈물의 금속성/치자꽃/식사/물푸레나무를 보러 갔다/화공/천진/고전적인 작별/수통 속의 천사/나침반/빠스깔의 파도
제4부
눈보라는 어디에 잠드나/유리/바람벽화/달과 잔/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나무에 기대다/축제/말들의 크레바스/초신성/검객/소리를 듣는 몇가지 방식/붉어진 공기/한 장 모포/그 여자의 소금/히아씬스와 나와 네안데르탈인의 원반던지기
소년/숲
해설 | 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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