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봄 여름 가을 겨울 / 법정스님

tlsdkssk 2017. 1. 18. 14:55

    봄, 여름 가을 겨울 / 법정스님



    1. 법정 스님의 봄

    산에는 요즘 한창 꽃이 피고 진다. 시에서 지적한 것처럼,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다. 그리고 혼자서 진다
    진달래가 벌겋게 온 산을 물들이다가 지고 나더니,
    그 뒤를 이어 이 골짝 저 등성이에서 산벚꽃이 허옇게 무더기 무더기로 피어났다
    꽃은 무슨 일로 필까?
    이런 엉뚱한 생각을 다 하게 된다
    생명의 신비 앞에 부질없는 생각일랑 접어둘 일이다

    꽃들은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않는다
    돌배나무는 돌배나무로 서 있을 뿐 배나무를 닮으려고 하지 않는다
    산자두도 산자두로서 만족한 따름 자두의 흉내를 내려고 하지 않는다
    벼랑 위에 피어 있는 진달래 또한 산자락의 진달래를 시샘하거나 부러워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꽃들은 저마다 자기 특성을 지니고
    그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피어나며 자신을 다른 꽃과 비교하지 않는다
    남과 비교할 때 자칫 열등감과 시기심 또는 우월감이 생긴다
    견주지 않고 자신의 특성대로 제모습을 지닐 때 꽃은 그 꽃답게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다


    2. 법정 스님의 여름.

    여름날 땀을 흘리면서 한참 고갯길을 오르다가 고갯마루에 올라섰을 때,
    가까이서 들려오는 솔바람소리는 오장육부까지 시원하게 해 준다
    소나무 아래서 솔바람소리를 베고 낮잠 한숨 자고 싶어진다
    내가 좋아하는 산중의 풍류다
    제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산길을 걸어올라가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맑은 복이다

    우리에게는 건너다니는 다리말고도 이웃 사이에 놓여진 인연의 다리,
    관계의 다리가 있다 눈에 보이는 다리가 무너지면 다시 놓으면 된다
    그러나 관계의 다리가 불편하거나 단절되면 인간의 영역이 그만큼 위축되고 상처를 입는다
    관계는 누가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러면서 관계 또한 우리들을 만들어간다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생각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으려고 한다


    3. 법정 스님의 가을.

    가을은 떠돌이의 계절인가.
    나뭇잎을 서걱서걱 스치고 지나가는 마른 바람소리를 듣노라면
    문득문득 먼 길을 떠나고 싶다. 바람이란 그 바탕이 떠돌이라서 그런지
    그 소리를 듣기만 해도 함께 떠돌고 싶어진다
    우리가 산을 찾는 것은 산이 거기 그렇게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 산에는 젊음이 있어 우리에게 손짓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때묻지 않은 사람과 때묻지 않은 자연이 커다란 조화를 이루면서
    끝없는 생명의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꽃은 필 때도 아름다워야 하지만, 질 때도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
    왜냐하면 지는 꽃도 또한 꽃이기 때문이다
    죽음을 생의 종말로만 생각한다면 막막하다
    그러나 죽음을 새로운 생의 시작으로도 볼줄 안다면 생명의 질서인 죽음 앞에
    보다 담담해질 것이다
    다된 생에 연연한 죽음은 추하게 보여 한 생애의 여운이 남지 않는다


    4. 법정 스님의 겨울.

    나는 겨울숲을 사랑한다.
    신록이 날마다 새롭게 번지는 초여름 숲도 좋지만,
    걸치적거리는 것을 훨훨 벗어 버리고 알몸으로 겨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는
    나무들의 당당한 기상에는 미칠 수 없다
    숲을 이루고 있는 나무들은 저마다의 특성을 지니고 있으면서 전체적인 조화를 지니고 있다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도 이런 숲의 질서를 배우고 익힌다면 넘치거나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대할 때 그 앞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도 함께 비춰볼 수 있다면
    나무로부터 배울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겨울숲에서 어정어정 거닐고 있으면 나무들끼리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빈 가지에서 잎과 꽃을 볼 수 있는 그런 사람만이 그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겉으로 보면 나무들은 겨울잠에 깊이 빠져 있는 것 같지만, 새봄을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눈속에서도 새움을 틔우고 있는 걸 보라. 이런 나무를 함부로 찍거나 베면
    그 자신의 한 부분이 찍히거나 베어진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나무에도 생명의 알명이인 영이 깃들여 있다. 침묵은 인간이 자기 자신이 되는 길이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삭는 씨앗의 침묵을 배워야 한다
    지금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는 우리들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 온 것이다
    겨울은 밖으로 헛눈 팔지않고 안으로 귀 기울이면서 여무는 계절이 되어야 한다
    머지않아 우리들에게 육신의 나이가 하나씩 더 보태질때 정신의 나이도
    하나씩 보태어질수 있도록 ...


    법정스님 (봄 여름가을겨울 중에서)-옮긴 글

    그림 / 박수근 화백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雲鈺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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