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에만 나오는 '가라지의 비유'는 마태복음 13장에 연달아 나오는 여러 비유들, 즉 겨자씨 비유(31-32절), 누룩 비유(33절), 보물과 진주와 그물의 비유(44-51절)와 함께 예수의 하늘(하나님)나라 비유들 중 하나다.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그런데 사람들이 잠자는 동안에 원수가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팼을 때 가라지도 함께 드러났다.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가라지를 뽑아 버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묻는다. 그러자 주인은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 추수 때까지 둘 다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 두어라. 추수 때 내가 추수꾼에게 일러서 가라지를 먼저 뽑아서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 버리게 하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게 하겠다"고 대답한다.
이 비유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밭은 인간의 마음을, 좋은 씨는 복음을, 밀은 신자를, 가라지는 불신자를, 원수는 사탄(마귀)을, 종은 복음의 사역자를, 주인은 예수를, 추수 때는 종말을, 추수꾼은 최후의 심판관인 하나님을, 불은 지옥의 불을, 곳간을 천국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이 땅의 많은 목회자들은 알레고리적 해석을 즐기며, 이러한 해석은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나름대로 유익한 교훈을 준다.
그렇지만 '비유'를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면 비유가 전달하려고 하는 본래의 의미를 놓칠 수밖에 없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비유라는 것은 본래 '하나의 초점'(one focus)을 가지고 있는데,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하여 비유에 나오는 여러 부수적인 요소들에 제각기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 그 하나의 초점이 흐릿해진다.
그렇다면 가라지의 비유는 어디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해야 할까? 예수가 이 비유를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하나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뭘까?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힐 위험이 있으므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그대로 내버려 두라'는 데에, 즉 밀과 가라지는 두부를 자르듯이 정확히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기 어렵다는 데에 초점이 모아져야 할 것이다.
신학자 호세 꼼블린은 이 비유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는데, 아마도 이 풀이가 비유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것 같다:
"지상에서 하나님나라는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항상 악마의 나라와 뒤섞여 있다. 사람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순수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
혹시 우리는 선과 악이 뒤섞여 있는 상태를 참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교회 안에 밀과 가라지가 뒤섞여 있는 상태를 참아 내지 못하고 있지는 않는가? 당장 악에서 회개하려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기를 바란 적은 없는가?
하나님의 지혜는 악한 사람들까지 포옹한다. 세계 역사 전체를 통하여 악한 사람들이 계속 활동할 것이고 하나님나라는 그들 가운데서 길을 찾아 나갈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관용에 있지 파괴하는 승리에 있지 않다. 악한 사람들과 선한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갈라놓는 일은 마지막 때에 가서야 일어날 것이다. 누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선하다가도 악해질 수 있고 악하다가도 선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선한 사람이라고 해서 영원히 선할 거라는 보장도 없고, 지금 악하다고 해서 영원히 악할 거라는 보장도 없다? 그렇다. 인간은 이렇듯 가변적인 존재다. 아니, 모든 인간은 선인인 동시에 악인이라고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악한 구석이 있고, 아무리 못된 사람이라도 선량한 구석이 반드시 있다. 자신은 100% 선하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
우리를 밀이라고 생각하면 비유 중의 주인의 태도가 잘 이해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를 가라지라고 생각하면 주인의 태도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