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을 본 적이 없지만 신을 믿으며 살아 왔듯,
수호천사를 본 적 없지만 수호천사가 있다고 믿으며 살아왔다.
종교적 신념이나 무슨 거창한 이유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그렇게 사는 것이 내게 보탬이 되고 득이 되기 때문이었다.
수호천사에 대한 얘기를 처음 들은 건 어린 시절이었다.
명동 성당 주일학교 수녀님이, 우리 모두에겐 하느님이 지정해주신 각자의 수호천사가 있고
그 천사가 우리를 보살펴주신다고 했다. 나는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든든했다.
종교가 달라 '천사'라는 어휘가 낯설거나 거북한 사람이 있다면 '수호령'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실 우리가 이름 짓고 말하는 용어는 모두 우리의 편의상 그렇게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기에 말이다.
아무튼 며칠 전 나는 엘리와 수호천사 얘기를 하다가 그 덕을 톡톡히 본 일이 있다.
이틀 전, 엘리 학교에서 학예회가 있었던 날 저녁이다.
그 날은 전학년 아이들이 강당에 모여 제각기 연습해온 악기 연주회를 했었는데,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엘리는 그예 고열이 나고 콧물을 흘리는 바람에 오후 4시경 병원엘 가게 되었다.
의사는 목도 많이 부었다며 알약을 주어도 괜찮겠느냐고 엘리에게 물었다.
엘리는 잠시 머뭇하더니,
"오늘 낮에 머리가 아파 양호실에 갔더니 알약을 주셔서 처음으로 먹어봤어요." 했다.
그러자 의사샘은 알약 처방을 해주겠단다.
집에 돌아와 약봉지를 펼쳐보니 물약이 세 개, 매끼마다 먹어야 할 알약이 다섯 알이나 된다.
나는 식탁 위에 약 봉지를 펼쳐 놓고 엘리를 불렀다.
엘리는 물론 나도 그 약을 어떻게 다 먹일 수 있나 우려가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엘리는 약이 안 넘어가면 어떻하느냐며 먹기도 전에 걱정만 늘어 놓는다.
밥도 넘기면서 왜 그런 걱정을 하느냐며 재촉했더니, 그럼 먹다가 목에 걸리면 어떻하느냐고 머뭇거린다.
나는, 실수로 알사탕도 그냥 넘긴 적이 있지 않았느냐며 채근하지만 엘리는 꿈적도 않는다.
나는 알약을 쪼개주며 넘겨보라고 했다. 그래도 엘리가 걱정을 하기에,
"그럼 수호천사님께 기도를 하자. 수호천사님, 약이 목에 걸리지 않도록 도와주세요."
그제야 엘리는 조각낸 알약들을 한 조각씩 넘기기 시작했다.
다 먹고 캡슐에 든 약 한 알이 남았다. 캡슐에 든 약은 혹시 약 맛이 쓸지 몰라 그건 그냥 넘겨보라고 했다.
엘리는 끝내 머뭇거리며 오른 손엔 물컵을, 왼 손엔 캡슐을 든 채 의자에 앉았다가 섰다가 좌불 안석이다.
내가 잠시 화장실 볼 일 보기 위해 자리를 비우고 나왔을 때였다.
엘리가 의자 발판(어린이용 의자라 발판이 있고 의자 높이가 성인용보다 높다)에 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실수로 컵을 놓치는 동시에 의자 옆으로 몸이 기울며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다.
컵을 떨어뜨린 순간 컵은 식탁 유리판과 부딪치며 산산조각이 되었고 엘리는 주방 바닥에 머리까지 쿵 찧으며 쓸어졌다.
나는 재빨리 엘리를 일으키며
"괜찮아?"물었다.
엘리는 공포에 질려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울음을 터뜨렸다.
식탁 위와 바닥엔 날카로운 컵 조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고 엘리의 손등엔 컵 파편들이 하얗게 덮혀 있었다.
"할머니, 무서워. 나 지금 다쳤어? 내가 왜 이런 건지 나도 모르겠어."
우선 엘리를 화장실로 데리고 가서 손등 위의 파편들을 물로 조심스레 씻어내렸다. 다행이 파편 조각은 하나도 살에 박히지 않고 얌전히 물에 쓸려 내려갔다. 엘리는 여전히 큰 소리로 격하게 울어대었다.
울면서 쉴 새 없이 말을 내 쏟았다.
"할머니, 나는 평생 알약 같은 건 안 먹을 거야. 그리고 저 의자도 바꿔달라고 할 거야....."
나는 아이가 진정할 때까지 아이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그래, 알았어. 할머니가 약국에 가서 가루약으로 바꿔올 할 테니 걱정하지 마."
그러자 엘리는
"할머니, 나 머리가 이상해지지 않았나 시험해 보게 계산 문제좀 내주실래요?"
나는 백지에 네자리수 덧샘 문제를 네 문제 내주고는 풀어보라고 했다.
그리곤 티비를 켜고 엘리가 즐겨 보는 어린이 방송을 틀어주었다.
엘리가 어느 정도 안정을 찾기 시작했을 때 나는 엘리에게 말했다.
"정말 수호천사님 도와주셨나보다. 만약 바닥에 쓰러지면서 깨진 컵 조각에 얼굴이라도 찔렸으면 어쩔 뻔 했어?"
엘리도 고개를 끄덕였다.
엘리가 계산 문제를 풀고 티비를 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비로소 바닥의 파편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큰 조각 작은 조각 가루처럼 잘게 부서진 조각들로 파편은 생각보다 많았고 분포도 넓었다.
만약 이 조각에 머리나 얼굴이 닿았다면 생각하니 새삼 등골이 오싹해서 나는 수도 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그야말로 큰 일이 날 뻔 했는데, 컵 하나 깨어진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다.
엘리와 내가 수호천사를 불렀던 순간 정말로 곁에 수호천사가 와주신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