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스크랩]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tlsdkssk 2016. 5. 29. 17:20

흰 바람벽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촉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샷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

 

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느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주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陶淵明'과 '라이

 

   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출처 : 금강요가원의 도반들
글쓴이 : 엘리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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