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내시의 유래와 실상 / 작가 신봉승

tlsdkssk 2016. 1. 22. 06:32
내시가 일종의 신체장애자임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그들이 장애자임은 확실하지만,
어디가 얼마만큼의 장애인가 하는 문제는 왕왕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첫째는, 성기인 남근과 고환 자체가 없다는 설과
둘째는, 남근은 있으나, 고환만이 없어서(혹은 거세 하여서) 오직 생식기능만이 없다는 설이다.
전자의 경우라면 성행위가 불가능할 것이지만, 후자의 경우라면 성행위는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생식 기능만 없다는 것이 된다.

어찌 되었거나 소위 고자라고 불리우는 장애자가 내시의 개념이 되겠지만,
여기에도 선천적인 고자냐 아니면 궁형과 같은 형벌에 의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고자냐
하는 것이 논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이상의 상태, 즉 남근은 있으나 고환이 없다와 남근과 고환이 모두 없다는 두 종류의 장애자 중에서,
혹은 태어날 때부터 고자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장애자 중에서
어느 경우가 내시에 합당할 것인가를 따진다면 논란의 여지가 얼마든지 있겠지만,
모두 내시의 요건을 갖추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선천적인 고자, 다시 말하여 고자로 태어나는 것은 남근이나 고환을 거세하는 것으로
생식 기능을 제거하게 된 연유나 배경에 대해서는 옛기록을 상고해 볼 수가 있다.
인위적으로 고환을 잘라내어 고자를 만드는 것(거세하는 일)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첫째는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시절 궁전에서 노래를 부르는 소년합창단이 있었는데,
소프라노 파트에 있는 소년들이 변성기를 맞으면서 목소리가 탁해졌던 탓에
좋은 화음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잘 훈련된 화음을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 변성기가 오기 전에
소프라노 파트의 소년들의 고환을 거세하기 시작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고환을 제거하면 호르몬 작용이 큰 변화를 일으키면서 수염이 나질 않고 목소리가 맑아진다는
의학적인 뒷받침까지 설명되어 있으니까, 일단은 신빙성이 있는 기록일 것임에 분명하다.

둘째는, 궁형이라는 형벌로 성적인 기능을 제거하여 임금의 여자들인 비빈들의 시중을 들게 하거나
감시하게 한 경우이다. 내시는 아니지만 비빈들의 거처를 출입할 수 있었던 사마천의 경우가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셋째는, 스스로 고자가 되기를 자청하여 남근과 고환을 잘라내고 내시가 되는 경우일 것이다.
여기에도 그에 합당한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음에 유의 할 필요가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고려왕조의 초기까지는 내시가 고위관직을 겸직할 수 있었으므로
인위적으로 생식 기능을 제거한 예가 있었을 것이지만 그 구체적인 기록은 찾기가 어렵다.
그러나 중국과 같은 큰 나라에서는 내시의 지위가 상서(조선 시대의 판서와 같음)의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기에 선천적인 고자만으로 그 수요를 충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남성을 상징하는 신체의 일부를 훼손해서라도 내시가 되는 것은 매력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이 이와 같다면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는 시술이 은밀히 성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록은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는 시술과정을 세밀하게 적어 놓지는 않았으나
남근과 고환을 제거하고 나서 요도에 밀대롱을 꽂고 재를 뿌린다.
상처가 아물고 밀대롱으로 오줌이 흘러 나오면 시술은 성공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
이 과정은 오늘날 돼지를 거세하는 방법과 조금도 다르지가 않다.

시술은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절단된 부분은 어찌하는가. 더러는 찾아가기도 하고
더러는 시술한 곳에 맡겨 놓았다고 하는데,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보관하였다는 기록은 없어도
보관의 필요성에 대한 해답은 분명하다.
전통적인 동양사상에, 신체불모수지부모 / 불감훼상효지시야 라는 것이 있으니,
몸이며 머리칼은 물론이고 피부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부모님이 물려주신 것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음이 효도의 시작이라는 뜻이고 보면 잘라 낸 남근이나 고환이 없고서는
죽어서도 관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그러므로 고위관직에 오른 내시나 부를 누리게 된 고자들은
잘라 낸 부분을 비싼 값으로 다시 사들여야 했던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인위적으로 남근이나 고환을 제거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심산 유곡에서 사는 화전민들이나, 극도로 빈한하여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갓 태어난 사내아이의 남근을 제거해 주는 것으로 가난에서 해방(내시라도 할 수가 있다면) 되기를
기원하는 풍조가 그것이다.

이런 경우, 갓난 아기의 남근에 명주실을 감아 놓으면 발육이 부진하다가 어느 시기에 이르면
떨어져 나가게 된다. 또 다른 경우는 고위관직에 있는 내시들이 후계자를 위하여 양자를 들이고
거세를 하는 경우이다. 김처선의 양자가 성이 다른 이공신이며, 그의 행적이 "조선왕조실록"에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를 입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내시들도 고려조 초기까지는 고위관직을 겸할 수가 있었음은 앞에서
거론한 바와 같지만, 그러자니 내시들이 자행하는 패해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시는 군왕과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었기에 조정의 기밀을 누구보다도 소상히 알 수가 있었고,
각 정파간의 반목과 대립도 정확하게 파악 할 수가 있었다. 그러므로 각 정파나 문벌의 두령들은
내시를 매수하여 그들이 알고 있는 정보를 비싼 값에 사들일 수밖에 없었고, 또 군왕은
자신의 손발과 같은 내시들의 노고를 치하한다는 명목으로 토지와 재물을 자주 하사하였다.

내시가 대단한 부를 누리면서 여러 처 . 첩을 거느리고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것은
주변의 여러 가지 여건이 그들에게 위세를 제공해 주었기 대문이었다. 따라서 희대의 명신 서열에
내시가 있고, 희대의 간신 서열에도 내시가 있었기에 당나라는 내시 때문에 흥했고 내시 때문에 망했다는
고사가 있는 것이다. 또 "조선인물고"에도 명신란에 내시가 소개되어 있음을 본다.


고려조 공민왕 때에 막강한 세도를 누리고 있던 최만생이라는 내시는 끝내 공민왕을 침실에서
시해하지를 않았던가. 바로 이 같은 폐해를 방지하기 위해 조선조에서는 내시의 겸직을
허용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을 유용하게 쓸 수가 있었다.

내시부의 우두머리를 판내시부사라고 부른다. 관직의 위에 판이 붙으면
판서의 지위와 같은 1품직이고 보면 실제로 장악하는 업무가 없다고 하더라도 대감으로 불리우는
막중한 지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판내시부사의 밑에 상선이 두 사람이니 모두 종2품이요, 상온과 상다가 각각 한 사람이니
이들은 정3품이다. 이 같은 서열로 종9품까지가 55명이요, 그밖에도 수많은 무품의 내시가 있어
내시부의 정원은 1백 40명으로 되어 있다.

내시들에게 성한 관리들보다 더한 세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명문대가에서 내시에게 다투어 딸을 주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면 더욱 자명해 진다. 내시가 고자와 같이 성행위가 불가능한 것을 알면서도 귀애하는 딸을
그들에게 출가하게 하는 것은 딸을 팔아서 치부를 하거나 출세길을 터보겠다는 탐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시 사위를 보는 명문가가 늘어나자 연산군은 10년(1504)5월 14일, 의정부에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린다.

내시들이 외간 사람들과 상통하니 궁중의 일이 혹시라도 누설 될 것인데,
더구나 인아(양쪽 사돈가 동서간의 통칭)와 관계가 되는 자임에랴. 지금 내관들이 많이 조정 관원들의
친족들에게 장가를 들으니 그 사이에 어찌 인연으로 왕래하여 궁궐 안에 일을 전파함이 없겠는가.
내시의 처족되는 조정관원은 외방으로 내보내어 서울에서 살지 못하게 하되
내관이 죽은 다음에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음을 중외에 효유하라.

이 같은 전지에 따라 조사를 하였더니 내시를 사위로 맞은 사람은 첨지사 조한손 등
무려 32명으로 나타났고, 또 정효창이라는 내시는 왕후의 친족에게 장가를 들었음이 밝혀지자
곤장 1백대를 때려서 귀양을 보냈다고 "연산군일기"에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내시들의 비행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내시들의 처족에 대해서는 이같이 엄하게 다스리면서도
내시 그 자체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어차피 가까이에 두고 부려야 했기 때문일 것이리라.

사대부가 1품의 벼슬에 오르면 그 부모에게도 벼슬을 추증한다. 이와같은 예에 따라
내시들에게도 직첩이 높은 자에게는 그 어버이에게 직첩을 추증하라는 전지가 있는가 하면,
직첩이 높은 내시들이 출입할 때는 길을 인도하는 구종도 쓰게 하였고, 벼슬아치나 사림들이
내시를 무시하거나 업신여기면 엄히 치죄하라는 전교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아서
내시의 위세가 결코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가 있다.

내시와 궁녀들과의 사랑이 발각되어 대궐을 쫓겨난 사례가 있다면
고자가 아닌 가짜 내시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연산군 10년(1504)년 9월 7일 조의 "연산군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전교가 등재되어 있다.

환관 이경과 석극산을 전의감 관원을 시켜 그들의 음근을 상고해 보도록 하라.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이 기사의 내용으로 미루어 본다면 성한 사랑이 궁궐에 잠입하여
내시 행세를 하고 있었음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 실례로 연산군은 가끔 전체 내시들의 바지를 내리게 하고
공개리에 그들의 하초를 살폈다는 기록 또한 "연산군일기"에 등재되어 있음에랴.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까만 미니어쳐 짚신 삼아주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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