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스크랩] 전혜린과 뮌헨

tlsdkssk 2016. 1. 22. 06:29
시인도 아니었다. 소설가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평론가도 아니었다.
굳이 딱지를 붙이자면 `번역문학가'라고나 할까.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과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가 그 이름을 뒷받침하는 번역서 목록의 일부다.
번역이 아닌 그 자신의 글이라고는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는, 하인리히 뵐의 소설 제목을 차용한 산문집,
그리고 <이 모든 괴로움을 또다시>라는 제목으로 묶인 일기가 전부인 여자.

근엄한 문학사에서는 그 여자의 이름을 발견할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여자의 글들은 이른바 문학적 가치나 문학사적 의미와는 거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차라리 사회사적·정신사적 범주에 놓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 여자를 형성시킨 것은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상처와 폐허였으며, 그 여자가 형성에 기여한 것은
60년대 한국의 미숙한 실존주의적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 50년대 후반 4년간의 독일 체험이 놓인다.
인간 실존의 근본적 조건에 절망하고 삶의 구체적 세목이 보이는 평범과 비속을 혐오했던,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순간순간을 불꽃처럼 치열하게 살고자 했던 여자.
한국이라는 박토에 뿌리내리기보다는 뮌헨의 자유를 호흡하고자 했으며, 여자의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보편적 성을 지향했던 여자. 인간이라는 육체적 현존이 아닌 정신과 관념만의 그 어떤 추상적 존재를 열망했던,
그리하여, 당연하게도,마침내는, 좌초했던 여자. 그 여자의 이름 전혜린.

전혜린(1934~65)이 단신으로 독일의 뮌헨에 내린 것은 1955년 가을이었다. 그가 태어난 황해도 해주와
그가 학교를 다닌 서울은 각각 북조선과 한국으로 갈라져 한바탕 피의 제의를 치른 뒤끝이었다.
분단 한국의 딸 혜린은 또다른 분단국 서독의 남부 도시 뮌헨을 찾았고 대학 근처의 동네 슈바빙에 짐을 풀었다.

“슈바빙은(…) 발전해가는 기계문명 속에 아직도 한 군데 남아 있는 낭만과 꿈과 자유의 여지가 있는 지대 (…).
그 속에 한번 들어가서 그것을 숨쉬고 그것에 익고나면 다른 풍토는 권태롭고 위선적이고 딱딱하고
숨막혀서 도저히 못 참게 되는 곳인 것 같다. (…) 슈바빙은 한마디로 청춘의 축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희생도 적지 않게 바쳐지는, 그러나 젊은 목숨이 황금빛 술처럼 잔에 넘쳐 흐르고 있는 꿈의 마을,
이것이 슈바빙이 아닐까.”

전혜린에게 있어 4년간의 슈바빙 시절은 한국에서는 맛보지 못한 본질적 삶의 세례를 받은 시기였으며,
그는 귀국해서 죽기 전까지 `복음'의 전파에 주력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얼마나 쉽게 인간의 의욕을 꺾는가”를
절감한 그가 언제나 그리워한 그의 도시는 뮌헨이요 슈바빙이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한국에 대한 혐오와 뮌헨을 향한 향수에 시달려야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뿌리뽑힌 사대주의적 지식인으로 매도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그의 전도된 향수에는
그 나름의 내력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벗어나고자 했던 조건에 대해 말하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

전혜린은 그의 길지 않은 생애를 통해 삶의 일회성이라는 치명적인 화두를 붙잡고 싸움을 벌였다.
“죽음을 씨로서 속에 지닌 과실로의 삶”이라고 그가 말했을 때 그것은 전혀 새로운 발견이나 독창적인 수사는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너무도 소박하고 치기만만해 실없는 웃음마저 깨물게 만드는 성질의 발언이다. 그럼에도 그의 발언이
60년대 한국 사회와, 그 뒤 90년대에 이르도록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요절한 천재'의 신화가 그에 대한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등생으로 성장해 서울대 법대를 다니다가
독일 유학을 떠났으며, 오식된 활자, 즉자·대자, 불합리, 자살 따위 실존주의의 용어들을 상용했고,
검정 스커트에 검정 머플러를 즐겨 두르고 다니던 사람. 도저한 페시미스트이자 동시에 순간순간을 미칠 듯이
강렬하게 살고자 했던 생의 찬미자. 평범을 경멸한 귀족주의자인가 하면 무수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삶의 패배자.
여자라는 옷을 거추장스러워했으면서도 출산과 육아의 경험에서 행복을 느낀 모순의 존재.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광휘처럼 감싸고 있는 것은 서른둘 젊은 나이에 맞은 성급한 죽음이었다.

그럼에도 아쉬운 것은 전혜린에게 역사가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개인의 차원으로 떨어졌거나 인간 보편의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그 가운데에 놓인 당대의 민족적 현실이라는 차원은 생략돼 있다.

전혜린이 이상의 연인처럼 찬미하고 동경해 마지 않았던 슈바빙은 뮌헨 중심가에서 북쪽으로 벋어나간 레오폴트 거리와
유럽 최대의 도시 공원이라는 엥글리셔 가르텐(영국공원)을 끼고 있는 동네다. 언제나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시청 광장 주변과 달리 대학촌인 이 동네의 주인은 자전거를 타고 다니거나 술집을 찾아드는 젊은 학생들이다.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책을 통해 8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기림을 받은 숄 남매의 이름을 딴 광장이 있는
대학본부로부터 북쪽으로 1㎞ 남짓 올라오면 `뮌헨의 자유'라는 근사한 이름의 광장이 나오고
그곳에서 동쪽으로 난 골목을 한동안 들어가다 보면 `제에로제'(연꽃)라는 이름의 카페가 나온다.
제에로제는 뮌헨에 상륙한 전혜린이 처음 음식을 사먹어본 뒤 값싸면서도 양질의 음식, 주인의 친절에 반해
단골로 삼았던 집이다. 지금은 스페인 음식점 겸 술집으로 바뀌었지만 옥호와 외벽만은 전혜린 당시와 다르지 않다.
지난 90년에 이 집을 인수했다는 주인 엘라디오 페르난데스(45)는 “전혜린의 자취를 좇는 한국 유학생과 관광객들이
심심치 않게 찾아온다”면서 “그뿐 아니라 독일과 세계 각국의 작가와 예술가들도 이집을 추억하는 글을 많이 남겼기 때문에
가게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에로제와 영국공원 사이에는 자그마한 냇물이 흐르고 그 연변에 아마도 전혜린이 세를 들어 살았을 집들이 서 있다.
전혜린이 `포의 어셔가를 연상시킨다'며 끔찍해했던 그 집들은 그러나 그 사이 새로 단장된 듯 안정된 주택가의 면모를 보인다.

주말의 영국공원 호수에는 뱃놀이를 즐기는 이들이 백조니 오리니 하는 물짐승들과 함께 떠 있고, 숲 사이로 난 산책로에는
걷거나 자전거 또는 말을 탄 사람들이 오가며, 모처럼 얼굴을 드러낸 여름 햇볕 아래 젊은 여자들이 벗은 몸을 태우는데,
가까운 교회에서는 정오의 종소리가 음악처럼 들려온다. 이 평화와 축복의 풍경 속에 녹아들지 못한 채
공원 기슭의 벤치에 홀로 앉아서 유학생 전혜린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조국의 파란 하늘과 맑은 물을 그리워했을까.
그 그리움 한 방울 눈물로 바뀌어 문득 굴러떨어졌을까.

문학으로 만나는 역사, 14 - 전혜린과 뮌헨 / 최재봉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까만 미니어쳐 짚신 삼아주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