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스크랩] 송도기생 황진이의 시와 사랑

tlsdkssk 2015. 11. 27. 07:05
 

              송도기생 황진이의 시와 사랑

                                                

1.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구를 생각하세요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 꾸시나요

   깊은 맘에 홀로 깨어 눈물 흘린 적 없나요

   때로는 일기장에 내 예기도 쓰시나요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 믿나요

   그대 생각하다보면 모든 게 궁금해요


2. 하루 중에서 내 생각 얼만큼 많이 하나요

   내가 정말 그대의 마음에 드시나요

   참새처럼 떠들어도 여전히 귀여운가요

   바쁠 때 전화해도 내 목소리 반갑나요

   내가 많이 어여쁜가요, 진정 날 사랑하나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예기를 해 주세요.


이것은 가수 이선희씨가 부른 ‘알고 싶어요’ 라는 노래의 가사이다. 송도명기 황진이(松都名妓 黃眞伊)가 헤어진 연인 소세양(蘇世讓)을 그리며 읊은 ‘월야사(月夜思)’ 라는 한시를 번안(飜案)한 대중가요이다. 현대어로 의역(意譯)하고 더러는 앞뒤를 바꾸기도 했지만 한 남성을 지극히 사랑하면서 그의 사랑도 확인하고 싶어 했던 황진이의 시 속에 담긴 애틋한 정서를 잘 나타내고 있다. 여기에 원래 황진이의 시 ‘월야사’ 를 소개한다.


月夜思

蕭寥月夜思何事     소슬한 달밤이면 무슨 생각 하시나요    

寢宵轉輾夢似樣     뒤척이는 잠자리엔 꿈인 듯 생시인 듯

問君有時錄妾言     문노니 그대여 때로는 제 말씀도 적어보나요

此世緣分果信良     이승에서 맺은 인연 믿어도 좋을까요.


悠悠憶君疑未盡     아득히 그대 생각하다보면 궁금한 게 끝이 없어요.

日日念我幾許量     날마다 제 생각 얼마만큼 하시나요.

忙中要顧煩或喜     바쁠 때 만나자면 싫어할까 기뻐할까

喧喧如雀情如常     참새처럼 조잘대도 여전히 정겨울까요.    

        


450년 전이나 지금이나 사랑하는 남녀 간의 그리는 정은 다를 바 없음을 느끼게 한다. 일부종사할 수 없는 자기의 운명을 깨닫고 스스로 기생이 되기는 하였으나 한갓 탐화봉접(探花蜂蝶)이 되어 달려드는 같잖은 한량들의 노류장화(路柳墻花)가 되기는 싫었다. 시와 음률을 아는 풍류남아만을 가려서 사귀었던 황진이가 편력했던 남성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인물은 아마도 양곡 소세양(陽谷 蘇世讓 1486~1562)대감이었을 것이다.


시서를 좋아했던 황진이가 당대의 뛰어난 문장가요 시인이며 글씨 또한 소설체(松雪體)의 대가로 알려진 소세양의 명성을 일직부터 듣고 흠모하여 오다가 이조판서까지 지낸 그가 관직에서 물러난 후 개성을 찾았을 때에 만났으니 연령의 차이는 많았겠지만 높은 정신세계에서 교감했던 그들이었기에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소설에서는 ‘누구와 몇 살 몇 살 때 만났고 누구누구는 몇 번째 남자이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한다. 황진이가 남긴 시문과 교류했던 인물들의 사적을 더듬어서 연대를 대체로 추정할 뿐이지, 황진이의 생몰년대(生沒年代) 자체를 모르는 판에 어떻게 정확한 연령이나 순차를 알 수 있겠는가. 다만 다음과 같은 시에서 양곡대감을 만난 것은 그가 판서를 역임한 후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奉別蘇判書世讓     소판서 세양을 받들어 이별한다.  

月下梧桐盡         달빛 아래 오동잎 지고

霜中野菊黃         서리 속에 들국화 노랗구나.

樓高天一尺         누각은 높아 하늘에 닿고 

人醉酒千觴         사람은 취하여 한 없이 마신다.


流水和琴冷         차가운 물소리 거문고소리

梅花入笛香         매화향기 피리와 어울리는데

今日相別後         오늘날 서로가 헤어진 후면

憶君碧波長         그대 그리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이 시는 황진이가 한 달 동안 사랑을 나누다가 한양으로 돌아가는 소판서대감을 멀리 배웅하면서 강가의 한 누각에서 마지막 잔을 나누며 읊은 시이다. “오늘날 서로가 헤어진 후면

그대 그리움 강물처럼 한이 없으리.“ 라는 끝 구절이 기약 없는 이별의 아픔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떠난 대감은 다시 소식이 없어 ‘월야사’ 라는 시로서 사무치는 그리움을 나타냈지만 지체 높은 양반은 기생을 다시 찾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황진이는 기다려도 오지 않는 임을 애초에 보내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하고 있다.


어져 내 일이여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아! 내 하는 일 좀 보아라. 이토록 그리울 줄을 몰랐더란 말이냐? 계시라고 했더라면 가셨을까 마는 내가 구태여 잡지 않고 보내 놓고서는 이토록 그리워하는 까닭을 나도 모르겠노라.’ 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토록 황진이가 사랑하고 그리워했던 사람이 양곡 소세양이었다면 오직 정신적인 순수한 사랑으로 흠모하고 존경했던 인물은 화담 서경덕(花潭 徐敬德 1489~1546)이었다. 당대의 고승 지족선사(知足禪師)마저도 파계시켰던 황진이로서 마음만 먹으면 정복하지 못할 사내가 없을 것으로 알았지만 아무리 유혹해도 미동도 하지 않던 산림처사 서화담에게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고결한 인품에 감복하여 평생을 스승으로 모셨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 역시 미동도 하지 않았다기보다는 한 사람의 사나이로서 가슴 속에 이는 불길을 억누르느라고 힘겨워했던 인간적인 모습을 다음 두 수의 시조에서 엿볼 수 있다.

  

마음아 너는 어이 매양에 젊었는다.

내 늙을 적이면 너는 아니 늙을소냐

아마도 너 쫓아다니다가 남우일까 하노라           서화담


‘마음아 너는 어찌하여 항상 젊은 줄만 아느냐. 몸이 늙는데 마음인들 늙지 않을 수가 있겠느냐. 내가 아무래도 마음 쏠리는 대로 쫓아가다가는 남의 웃음꺼리가 될까 걱정이라’ 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떨쳐버리지 못하는 마음을 또 이렇게 읊조린다.


마음이 어린 후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 운산(萬重 雲山)에 어느 임 오리요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화담


‘마음이 어리석다보니 하는 일이 모두 어리석기만 하다. 이 깊은 산속까지 어느 임이 찾아올까마는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는 나뭇잎소리에 행여 임이 아닌가.’ 하고 가슴이 설레임을 나타내고 있어서 화담도 어쩔 수 없이 황진이의 매혹적인 여성미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이를 극복하여 깨끗한 애정으로 승화시켰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화담의 속마음을 짐작한 황진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한다.

                           

내 언제 무신(無信)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대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온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하리요       황진이


‘제가 언제 한번이라도 선생님을 속인 일이 있기에 신의가 없다 하십니까. 달도 다 기운 한 밤에 찾아오신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가을바람에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야 전들 어찌 하겠습니까.’ 하면서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한다” 는 화담의 은근한 연정을 넌지시 받아서 ’가을바람에 지는 잎 소리를 낸들 어쩌겠느냐‘ 고 체념하는 듯, 속 타는 애정을 간절히 담고 있다.

                            

청산(靑山)은 내 뜻이요 녹수(綠水)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 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 예어 가는다           황진이


내 뜻은 우뚝 선 산과 같이 변함이 없건만 임의 정은 흐르는 물처럼 스쳐 가는 것인가. 임께서 가신다 해도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산 아래 흐르는 물도 산을 못 잊어 저토록 소리 내어 울며 가는 것‘ 이라면서 자기의 사랑을 다짐하고 스승의 속마음까지도 깊이 헤아리고 있다. 


황진이가 깊이 사귀었던 또 하나의 사나이는 부운거사 김경원(浮雲居士 金慶元)이었다. 어느 소설에서는 그가 황진이의 첫 사내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부운거사라고 자처한 사람이었으니 아마도 세상사에 뜻이 없고 오직 자연을 즐기며 풍류를 좋아했던 헌헌장부요 방랑시인 이었던 모양이다. 그와 얽힌 두 수의 한시와 한 수의 시조가 전한다.


別金慶元

三世金緣成燕尾     세상에 맺은 인연 아름다운 짝이 되니

此中生死兩心知     생사가 그 중에 있음을 우리만이 알리로다

楊州芳約吾無負     양주에서 맺은 언약 내 어찌 어기랴만

恐子還如杜牧之     두목지 풍채 같은 그대가 걱정이로다.


첫사랑이어서 그랬을까? 멀리 그의 고향 양주까지 따라가서 작별한 모양이다. 죽기 살기로 금석 같이 맺은 인연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고 다짐하면서 나야 그 약속 저버릴 이 없지만

두목지(杜牧之: 뭇 여성의 우상이었던 당나라의 미남시인) 같은 당신의 풍채가 걱정 된다고 불안한 심사를 나타내고 있다.   


相思夢

相思相見只憑夢     우리 서로 만날 길은 오직 꿈길이기에

儂訪歡時歡訪儂     임 찾아 갔더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갔다네

願使遙遙他夜夢     바라건대 이다음의 꿈에는

一時同作路中逢     같은 시간에 떠나 도중에서 마나지이다.


한번 떠난 임은 소식이 없고 꿈에서나 만나려고 찾아가면 그 임도 날 찾아갔다고 한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엇갈리지 말고 동시에 출발해서 도중에서 만나자고 꿈속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간절한 소망을 담고 있다. 이 시 또한 ‘꿈’ 이라는 제목의 가곡이 되어 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꿈/김성태/노래 송광선

1. 꿈길 밖에 길이 없어 꿈길로 가니

   그 임은 나를 찾아 길 떠나셨네.

   이 뒤엘랑 밤마다 어긋나는 꿈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지고.


2. 꿈길 따라 그 임을 만나러 가니

   길 떠났네 그 임은 나를 찾아서

   밤마다 어긋나는 꿈이량이면

   같이 떠나 노중에서 만나를지고.



꿈길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그 임은 영영 소식이 없으니 ‘나는 이처럼 한곳에서 기다리고 있지만 구름처럼 떠도는 임이 다시 올 리가 있느냐.’ 고 체념하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산은 옛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로 흐르니 옛 물이 있을소냐

인걸도 물과 같하야 가고 아니 오노매라          


그래서 못 믿을 것은 사내의 마음이고 못 넘을 것은 양반과 기생의 신분이라 하여 황진이의 남성편력이 시작되었고 지족선사와 화담선생 같은 고승과 처사를 유혹하려는 오기까지 생겼던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던 시절에 종실의 긍지를 가지고 기생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 뽐내던 고고한 선비 벽계수를 송도로 유혹하여 시조 한 수로 그를 말에서 떨어지게 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전하는 그 유명한 시조가 ‘청산리 벽계수야’ 이다. 일설에는 벽계수가 먼저 황진이를 유혹한 후에 보기 좋게 뿌리쳐서 망신을 주려고 했다가 도리어 눈부신 자태와 청아한 시조에 매혹되어 그만 부끄러운 꼴을 보이고 말았다고도 한다.


청산리 벽계수(靑山裏 碧溪水)야 수이 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一到滄海)하면 다시 오기 어려워라

명월(明月)이 만공산(滿空山)하니 쉬여간들 어떠리

그런데 그 벽계수가 그 간에는 왕실종친으로서 벽계수(碧溪守)를 지낸 이창곤(李昌坤)이라고 했었는데 근자에 세종대왕의 증손이요 벽계도정(碧溪都正)를 지낸 이종숙(李終叔)이라는 새로운 고증이 나왔다. 그의 묘가 원주 문막에 있다며 그의 14대손이라는 분은 벽계수의 낙마설(落馬說)을 부인할 뿐 아니라 도리어 황진이가 벽계도정을 유혹하려다 실패하고 그의 인품을 흠모하여 읊은 시조인데 뒷사람들이 황진이를 돋보이게 하려고 지어낸 억설이라고 주장한다.


그 외에도 금강산을 함께 유람했던 이생(李生: 이름이 전하지 않음) 등 많은 남성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편력에 실증을 느꼈던지 마지막으로 6년 동안을 동거했던 남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음률의 달인이요 천하명창이었다는 선전관 이사종(宣傳官 李士宗)이다. 당대에 황진이와 비견할 명창은 오직 이사종 뿐이라는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그를 한번 만나고 싶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시절에 감히 꿈에도 생각지 못할 전대미문의 계약결혼이 이루어졌다.


먼저 이사종을 따라가 서울에서 3년을 살고 후엔 황진이가 사는 송도에서 3년을 살기로 작정하였을 뿐 아니라 서울에서의 생활비는 이사종이 대고 송도에서는 황진이가 대기로 했던 그 약속을 그대로 이행해서 만 6년을 살고 깨끗이 헤어졌다고 하니 황진이야말로 이 땅에서 남녀평등을 최초로 이룩해 냈던 여성이요 프랑스의 저 유명한 사르트르Sartre와 보봐르Beauvoir의 계약결혼보다도 400년 앞섰던 자유연애사상을 지닌 신여성이었다 할 것이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안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른 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송도에서 동거하는 중에도 서울 본가에 올라간 이사종이 좀처럼 내려오지 않아서 애태우는 밤이 많았었나 보다. 독수공방하는 지루한 밤 그 긴긴 시간의 한 토막을 잘라 두었다가 항상 짧게만 느껴지는, 임과 함께하는 밤을 길게 연장하고 싶다는 발상이야말로 황진이다운 열정을 멋지게 표현했다 할 것이다.


황진이 이야기에 빼어놓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인물이 백호 임제(白湖 林悌 1549~1587)이다. 그는 황진이보다 한세대 뒤의 사람이었으니 생전에 그를 만난일도 없었으련만 평안도도사(都事)가 되어 부임하던 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 제사를 지내고 혼자 술잔을 들면서 다음과 같은 시조를 읊었다.


청초(靑草)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紅顔)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설어 하노라


이로 인하여 부임길이 늦어짐으로서 구설수에 올랐던 임백호는 마침내 파직이 되어 돌아오고 말았으니 당대의 문장가요 호방한 시풍으로 명성을 떨쳤다는 선비가 그 수모를 어찌 감내 했는지 고소를 금치 못하지만 그래서 더욱 유명해졌고 그 시조가 오늘날 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했으니 그 또한 황진이의 명성에 힘입은 것이 아니겠는가.


저지난해에는 남북의 작가들이 제가끔 황진이 소설을 써서 인기를 끌더니만 영화계에서는 북한작가 홍석중(홍명희의 손자)의 ‘황진이’를 영화화하고, MBC에서는 북한의 금강산과 송도의 박연폭포 등을 현지로케해서 사극 ‘황진이’를 만들어 방송함으로써 많은 시청자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500년 전 황진이의 숨결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했다.


                                                                                                                      觀  齋   朴  完  鍾

                                                    

                                                              

                              





출처 : 송운 사랑방 (Song Woon Art Hall)
글쓴이 : 파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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