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퍼즐게임 / 마경덕
봄이 출하되었다
봄을 가장 많이 소비하는 시인들이 몰려들어
맨얼굴로 바람을 만져보고
육질이 연한 봄을 구입했다
재생 뻐꾸기테이프, 냉이초록접시, 민들레바람세트… 봄의 밀도를 올려줄 재료들이 와르르 책상으로 쏟아졌다
바람의 힘줄도 말랑해져서
매만지기 좋은 계절,
어떻게 특별한 봄을 만들 수 있을까
아지랑이를 아지랑이로 민들레를 민들레로 말할 수 없는 사람들은
봄을 구기고 찢고 비틀었다
가끔 형체를 알 수 없는 기형의 봄도 태어났다
바람의 본을 뜨고 햇살을 오려 끼워 맞추자
봄은 한 장으로 압축되었다. 완성된 봄은
메일로 전송되고 출판사로 날아갔다
봄바람이 50%만 섞여도 적중이다. 남은 절반은 목에 걸린 머플러의 몫
봄을 사용한 소비자들
당신들은 왜 짜릿하고 상큼한 봄을 개발하지 않는 거죠?
톡 쏘는 맛도 없이 밍밍하다고, 그 맛이 그 맛이라고
여기저기서 불만을 터트렸다
붉은 개나리 검은 목련이 나온다는 소문이 퍼졌지만
늘 정답 같은 봄만 찾아왔다
<다층> 2012년 봄호
저녁과 밤의 사이에서
마경덕
해질 무렵 저녁이 오는 소리를 들었다
햇살에 등을 데우던 나무들이 남은 온기를 속주머니에 찔러 넣고 있었다
언젠가 어둠 속에서 바라본 강 건너 불빛 서너 개 정도의 온기였다
어린 새들이 둥지에 드는 동안
맨발로 이곳까지 걸어온 저녁은 신발을 고르고 있었다
나뭇가지에 걸린 저녁의 신발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헐렁한 신발을 신고
저녁이 허리를 펴는 순간,
일제히 팔을 벌리는 나무들, 참나무 품에 산비둘기가 안기고
떡갈나무 우듬지에 까치가 자리를 잡았다
잘 접힌 새들이 책갈피처럼 꽂히고
드디어 저녁이 완성되었다
해가 뚝 떨어지고 숲은 서둘러 문을 닫았다
순식간에 시야가 어두워졌다
저녁과 밤이 이어지는 그 사이를 서성거리며
난생 처음 어둠의 몸을 만져보았다
자꾸 발을 거는 어둠에게 수화로 마음을 건네도
사람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다
더듬더듬 길을 찾는 동안, 자정의 밤은 산꼭대기까지 차올랐다
뻘밭에 빠져 달려드는 바다를 바라보던 망연한 그때처럼
일시에 몰려든 어둠으로 숲은 만조였다
썰물의 때를 기다려야한다
어제와 오늘을 이어 붙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나무들도 한줌 체온을 껴안고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외출이 신발을 신는 것으로 완성되듯이
신발 끈을 조이며 어둠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수척한 밤이 몇 번이나 나를 들여다보고 지나갔다
어둠의 이마를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사람의 문학> 2012년 봄호
입관 /마경덕
하얀 보에 덮여 누워있는 어머니
둥근 베개 하나가 무거운 잠을 받치고 있었다
장례지도사인 젊은 염습사는
보 밑으로 손을 넣어 익숙하게 몸을 닦았다
감정은 삭제되고 절차만 기억하는 손길로
미처 살아보지 못한 생의 끝자락을 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많은 주검을 갈무리하여 먼 길을 떠나보냈을까
저 숙련된 손길은 어느 날, 떨어져나간 단추를 주워 제자리에 달듯
벌어진 틈을 메우고 있는 것
하얀 종이로 싸늘한 몸을 감싸는 동안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살아온 족적이 다 찍힐 것 같은 순백의 백지는
어머니의 마지막 속옷이었다
자식들이 사준 속옷은 장롱에 켜켜이 쌓아두고 구멍 난 내복만 입던 어머니
며느리에게 퍼붓던 불같은 성깔도 다 시들어
몇 장의 종이에 차곡차곡 담기는 순간,
눈물이 나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다 젖었다
어머니, 편히 가세요 그동안 미워했던 것 다 잊으세요
진심으로 시어머니를 부르며 딸인 듯 목이 메었다
습신을 신은 발, 앙상한 손을 감싼 악수幄手를
꼭 쥐어보았다. 이 작은 손이
밥상을 밀치고 내 가슴을 후볐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던 막내시누이는 꺽꺽 짐승처럼 울고
나는 입을 막고 흐느껴 울었다
당신이 손수 장만한 치자 빛 수의를 입고
허리띠를 나비리본처럼 단정히 묶은 어머니
어느새 떠날 채비를 다 마치었다
지긋지긋한 암 덩어리는 곱게 포장되어 입관을 기다리고 있었다
<문학사계> 2012년 봄호
조화造花의 통증 / 마경덕
벽에 매달린 붉은 장미
조화라고 불리는 순간 물기를 다 버렸을 게다
가위도 철사도 두렵지 않다고, 메마름으로 오래 버틸 수 있다고
어차피 꽃이니까, 서로를 위로하며
더 싱싱하게, 더 아름답게, 사실적으로 진화하는
造花들
그들의 엄마는 꽃이 아닌 사람
야간작업에 졸음이 밀려오고 목이 타면 물을 마시는 사람
철사에 찔리고 몇 푼의 부업에 가슴이 찔리는 꽃의 엄마들
상처를 생산하는 공장에게 마음을 소비하고 제 뿌리를 더듬으며
줄줄이 꽃을 낳고
출생지와 이름표를 붙여 세상으로 내보냈다
절화折花들은 모두 환상통을 앓는다
태초의 고통은 뿌리 없이 태어난 것
잎잎 수많은 지문과 뜨거운 숨결이 들어있어
볕에 바래고 먼지에 찌들어 늙어간다
물에 닿으면 뼈도 녹는다
이슬처럼 반짝이는, 흐르지 않는 눈물을 매달고
활짝 웃는 조화들
<詩로 여는 세상> 2012. 봄호
집들의 감정 / 마경덕
이제 아파트도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푸르지오, 미소지움, 백년가약, 꿈에 그린, 이 편한 세상…
집들은 감정을 결정하고 입주자를 부른다
생각이 많은 아파트는 난해한 감정을 보여주기도 한다
타워팰리스, 롯데캐슬베네치아, 미켈란, 쉐르빌, 아크로타워…
집들은 생각을 이마에 써 붙이고 오가며 읽게 한다
누군가 그 감정에 빠져 입주를 결심했다면
그 감정의 절반은 집의 감정인 것
문제는
집과 사람의 감정이 어긋날 때 발생한다
백년가약을 믿은 부부가 어느 날 갈라서면
순식간에, 편한 세상은 불편한 세상으로 바뀐다
미소는 미움으로, 푸르지오는 흐리지오로 감정을 정리한다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진달래, 개나리, 목련, 무궁화 아파트는 제 이름만큼 꽃을 심었는가
집들이 감정을 정할 때 사람이 간섭했기 때문이다
금이 가고 소음이 오르내리고 물이 새는 것은
집들의 솔직한 심정,
이제 집은 슬슬 속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詩로 여는 세상> 2012. 봄호
옥상/ 마경덕
도시의 옥상은 매력적이다
평수에 없는 땅을 배로 늘려 덤으로 준다
14평에 살아도 사실은 28평인 셈
하늘에 등기를 마친 건물의 꼭대기는
별도로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다
많은 옥상을 거느린 하늘은
비와 햇빛과 바람으로 옥상이 자신의 소유임을 증명한다
집들의 정수리에서 상추와 고추가 자라는 것은
지붕을 싫어하는 옥상의 버릇 때문
오래된 이 습관 탓에
스티로폼 상자에 고추가 달리고 항아리에 담긴 간장이 익는다
가끔은 쓰레기더미나 폐품을 방치하고 물탱크에
시신을 감추기도 했지만 그것은 옥상의 잘못이 아니었다
다닥다닥 달린 창문을 빠져나와
넥타이를 풀고 잠시 숨을 돌리는 곳, 도시의 숨구멍은
결국 이 옥상이다
사내들은 이곳에 와서 생사를 결정하고
하루를 충전한다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 한잔을 들고
머리 위를 날아가는 새들이나 흘러가는 구름 따위를
생각의 갈피에 눌러두어도 좋을 것이다
드물게 추락사도 있었지만
그들은 깔끔한 옥상의 성격을 몰랐기 때문
제 평수만 고집하는 옥상은 한 뼘의 허공도 탐내지 않는다
한 발이라도 제 품을 벗어나면 결코 손을 잡아주지 않는다
평수에도 없는 땅에 옥탑방을 들이고
꼬박꼬박 월세를 챙기는 주인도 가져갈 수 없는 건
아무도 그 평수를 모르는 탁 트인 하늘이다
<맥> 2011년 9호
거꾸로 콩나물 / 마경덕
전주콩나물국밥집
다른 집보다 천 원이 비싸다하니 주인아주머니 벽에 붙은 광고지를 가리킨다
콩싹이 3cm쯤 자랐을 때 뒤집어 키운 콩나물이란다
키가 3cm라면 아직 세상물정도 모르는 어린것들인데 피가 거꾸로 돌도록 물구나무를 세우다니,
재배장치로 발명특허를 받은 콩나물은 잔뿌리가 없다. 그것은
아직 첫발도 떼지 못했다는 것
거꾸로 자라
저항력이 생겨서 농약을 치지 않았다는데, 그 저항력을
뒤집어 보면 악착스럽고 모질어졌다는 말
살기 위해 오기를 부렸다는 말
입도 떨어지지 않은 것들, 얼마나 독심을 품었으면 뿌리조차 썩지 않으랴
콩켸팥켸 뒤섞여 머리만 키운 콩나물
아삭아삭 씹힌다
피가 거꾸로 돌기 시작한다
<시와 문화> 2011년 겨울호
[
마경덕 시인
2003년「세계일보」신춘문예로 등단
2005년 시집「신발論」문학의전당
현재 시마을문예대학 시창작 강사
롯데MBC 문화아카데미 시창작 강사
AK 문화아카데미 시창작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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