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보따리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는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 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 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후퇴지역*외 1편
마경덕
한때 집들은 슬금슬금 언덕배기를 점령했다
집들의 발이 제멋대로 자라던 시절이었다
어둠을 틈타 전진하는 방법은 이미 낡은 전략
자진을 미루면 강제가 달려오고 욕설과 시비가 뒤섞인다
움막 한 채는 누군가의 목숨
후퇴를 모르는 막무가내와 싸움에 끼어든 집은 사생결단이다
건축법을 들이대면 끝내 무너지는 집들,
법은 집보다 힘이 세다
등을 맞대고 배수진을 친 길갓집들, 보행권 확보에
몇 차례 입씨름이 둘러앉고
싹둑, 집들이 두부처럼 잘렸다 황당한 집들,
수십 년 버텨온 뼈대가 그렇게 무른 줄 처음 알았다
민망하게 벌어진 집의 입, 썩은 이가 드러났다
길을 잡고 밥을 벌던 수선집과 김밥집이 사라졌다
길들이 담합해 품을 늘리고 오가는 속도를 올린다
보상금으로 성형한 집들,
입을 다물자 유리창과 타일이 반짝인다
후퇴한 자리에 주차선이 즐비하다
건너편 재개발아파트
집들의 발자국 위에 구청은 나무와 꽃을 심고 친절한 푯말을 세운다
빚은 늘고 동네는 점점 좋아진다
*건축부지와 실제건물사이의 남은 공간
커피 잔과 머그컵
마경덕
커피를 쏟았다
손을 놓친 실수는 얼룩이었다 얼룩을 방치한
오물의 이전은 쓸모였다 쓸모가 낡아 쓰레기가 되듯,
쓰레기 이전은 모두 소용所用이었다
미끈한 모양새로 완성된 이름
비어있어도 여전히 커피 잔이다
깍듯한 받침접시 부록으로 딸려오는
마주보는 형식, 세트는 훈훈하다
투박한 그녀, 누가 받침이 되어줄까
날렵한 커피 잔을 만나
뒤늦게 쏟아진 연애가 적금을 깼다
실수는 실금과 같은 말,
파산한 연애를 방치하면 우울이 되듯, 상처가 낡아 칩거가 되듯
쓰러진 잔은 안부부터 챙겨야한다
손잡이를 놓친 모태솔로 점점 가벼워진다
받침이 없어도
이전엔 묵직한 머그컵이었다
『우리詩』2014년 4월호
연애 죽이기
마경덕
연애가 죽었다, 그토록 싱싱하던 연애가
가장 치명적인 단어를 생각했다
밥풀을 뭉개듯 부패된 연애를 봉합했다
굳이 틈을 메우지 않겠다고
입술을 깨무는 동안, 빈 우편함에
스무 번의 겨울이 고드름처럼 매달렸다
머리핀처럼 꽂고 다닌 연애가
낯선 가슴에서 브로치처럼 반짝이고 있을 때
버튼을 눌러 변기 속으로 연애를 수장시켰다
죽었다 죽었다 죽었다니까…
꾹꾹 눌러둔 감정이 세면대에 떠올랐다
물때 낀 시간들이 화장실 배수구를 틀어막았다
터지기 직전의 팽팽한 연애
치명상을 입기 전 급소를 찔러 바람을 빼겠다고
일초라도 빨리 연애를 죽여야한다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실패한 연애를 껴안고 중얼거렸다
연애가 죽었다, 연애가 죽었다
『시에티카』2014. 상반기
위대한 선크림(sun cream)
마경덕
태양 중심부 온도는 1500만度
빛에너지는 십만 년 만에 태양표면에 도착했다
까마득한 걸음으로 흑암黑暗에서 태어난 빛
침투하라, 침투하라
태양의 명령대로 지구를 향해 달려오는 빛의 전사들, 가시광선에 숨긴 적외선 자외선을 끌고
1초에 지구 일곱 번 반을 도는 축지법으로
8분 만에 지구를 점령했다
오후 두 시는 에너지의 시간, 팔랑팔랑 강변 미루나무 체온이 올라간다
환호하는 식물들 모두 빛 쪽으로 휘어진다
사방으로 튀는 빛의 파편들, 익사한 무리에 강물이 반짝인다
8분 전 태양을 출발한 빛이 콧잔등에 내려앉는다 사람의 걸음으로 4270년이 걸린다는
8분의 거리
아득해서 눈물이 고인다
자외선이 생살을 뚫는 시간
태양의 내부까지 해부한 지구인들 핸드백에 비밀병기를 숨기고 있었다
그들의 천적은
노화老化였다
『시산맥』2014년 봄호
딸기의 사생활
마경덕
맨발로 기어간다
척추가 없는 생, 마디마디 헛뿌리를 내민다
흙밭을 뒹구는
노숙의 힘으로 딸기밭은 번성한다
입덧의 계절,
헛구역질에 봄이 달콤해진다
게워낸 붉은 물에 잎자루가 무겁다
비닐하우스로 이전해 사람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그녀들
벌통 하나가 딸기밭을 다스린다
집단 사육당한 사랑들,
철없이 무더기로 태어나도 호적에도 못 오르는
벌의 혼외자식들
땅과 하늘의 궁합, 날개가 뒤섞여도
여전히 바닥이 우성優性이다
어차피 노골적인 그녀들
살구 자두 복숭아처럼 굳이 씨를 감추지 않는다
맨몸에
깨알 같은 씨를 촘촘히 박는 전략으로
딸기의 사생활은 이어진다
웹진『시인광장』2004년 1월호
나무고아원
마경덕
잎을 피우고 가지를 내밀지만,
그것은 잠을 설친 수많은 밤이지요
새를 어르던 팔과 둥지를 얹어둔 어깨와 어둠을 더듬던
발이 잘린 시간이고요
톱날에 이를 앙다문 흉터를 사람들은 나이테라고 불러요
나무들이 다시 목을 매다는 것을 봄이라고 부르듯이,
거세된 나무들
나무들의 성대를 찾지 못한 바람도 목소리를 잃었어요
오줌을 지리고 똥도 싸서 기저귀를 찬 나무도 있어요
늙은 느티나무도 링거를 꽂고 아기가 되었듯이,
지레 풀이 죽어요
침을 뱉고 뒤통수에 주먹질하던 맹랑한 양버즘나무도
목을 움츠렸어요 절름발이 버드나무도 치렁한 머리와
허공에 걸어둔 낭창한 팔을 찾고 있어요
죽음 직전에 구조된 나무들
나무의사들이 나무의 눈물을 닦고 있어요
바람이 좋아하는 긴 머리와 잘려나간 목을 붙여준다고
사람이 나무의 엄마가 되겠다고,
포클레인을 모르는 애송이 유기목들
철이 들면 지지대가 지팡이 인줄 믿게 되겠죠
저절로 고아라는 말을 알게 되는 것처럼
『시와경계』2013년 겨울호
맹물
마경덕
떼 지어 산을 넘은
물의 근육들
산봉우리 구름무늬로 문신을 했다
웅덩이에 둘러앉아 다리쉼하는
질펀한 물의 엉덩이들
보든 말든
거침없이 알몸이다
깔고 앉은 바닥까지 다 보인다
『시와경계』2013년 겨울호
뚜껑
마경덕
꽃게는 발을 높이 치켜든다
두 손을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인간의 세계에서 두 손을 드는 건 맨 마지막 방법인데
게들의 법칙은
그 방법이 우선이다
최선은 최후가 될 수 있다
저항은 마치 항복처럼 보여 두 발이 두 팔로 읽힌다
물샐틈없이 단단히 조인 모래펄의 시간들
열리면 끝장이다
목숨을 병뚜껑처럼 따버리는 뭍의 세상에게
다리도 뚝 떼어주고 게구멍을 향해 옆걸음질 쳐야한다
고스란히 싱싱한 뚜껑은
조개의 패주처럼 질긴 근육질이다
뚜껑에 알을 숨긴 꽃게
필사적이다
항복인지 저항인지 두 개의 발로, 아니 두 개의 팔로
그릇처럼 우묵한 등딱지는 밥을 비벼먹기 좋다
『열린시학』2013년 겨울호
물의 표정
마경덕
돌멩이를 던지는 순간
둥근 입 하나가 떠올랐다
파문으로 드러난 물의 입,
저 잔잔한 호수에 무엇이든 통째로 삼키는 거대한 식도食道가 있다
물밑에 숨은 캄캄한 물의 위장
가라앉은 것들은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누적된 그것들을 감추고 평온한 호수
물가에서 몸부림치던 울음을 지우고 태연하다
계곡이며 개울을 핥으며 달리다가
폭포에서 찢어진 입술을 흔적 없이 봉합하고
물은 이곳에서 표정을 완성했다
물속에 감춰진 투명한 찰과상들, 알고 보면 물은 근육질이다
무조건 주변을 끌어안는
물의 체질
그 이중성으로 부들과 갈대가 번식하고 몇 사람의 목숨은 사라졌다
물의 얼굴이 햇살에 반짝인다
가끔 허우적거림으로 깊이를 일러주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잔잔한 물의 표정을 믿고 있다
『문예바다』2013. 창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