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한자락

눈물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tlsdkssk 2013. 9. 19. 17:37

나란 인간과 눈물의 관계는 새삼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끈끈한 사이다.

어릴 적 별명이 울보였고, 매일 1시간도 넘게 울었다고 하니

나는 타고난 울보임에 틀림없다.

그렇더라도 오늘 추석 미사를 드리며 고장난 수도꼭지처럼 울었던 것은,

더구나 바로 옆에 아들이 있는데도 대책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던 것은,

정말이지  쑥스럽고도 민망한 일이었다.

처음엔 내색을 않으려 슬쩍슬쩍 눈물을 찍어냈는데,

그럴수록 눈물은 넘치는 것이어서 끝내는 숨길 수가 없었다.

대체 눈물은 어디에 숨어 있다가  이리도 흐르는 것일까.

 

미사 시간 중 분향 차례가 있었다.

우리민족의 정서를 반영한 차례상이 차려져 있는 제대 앞으로 나아가

신자들이 차례로 분향을 하고 허리 숙여 절을 하는 동안

자리에 앉아 있는 신자들은 구성진 가락의 연도(죽은 이를 위한 기도)를 합송하였다.

나도 이 세상을 살다간 모든 죽은 이들과 내 조상님들과 3년 전 세상을 뜬 남편을 생각하며 연도를 드렸다.

추석 연휴에 며늘이 모처럼 근무를 쉬게 되어 어제는 우리 가족 모두 성묘를 다녀왔고,

추석 미사에도 함께 할 수 있었다.

엘리가 아직 어리기에 며늘과 엘리는 아동 방으로 가고,

나와 아들만 일반 신자석에서 미사를 드렸다.

 

신의 눈으로 보면 산 자나 죽은 자나 모두가 한낱 피조물일 뿐 큰 차이가 없을 것 같다.

살고 죽는 것은 오직 유한한 인간의 문제일 뿐 영원 자체이신 신에게는 해당되는 게 아닐 터이므로.

그러니 죽었다고 더 슬퍼할 것도,  살아 있다고 더 기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살아 있다는 것은 자신의 현재 모습이 어떠하든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이며,

불교적 입장으로 해석하면 자기 안의 불심을 개발하여 해탈의 길로 한 걸음 더 나아갈 수도 있는 일이라는 게

차이라면 차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저승을 가본 적이 없으니 저승엔 또 어떤 방법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승이 저승보다 더 편하고 안락하다는 증거도 없으며,

어쩌면 저승의 존재들이 이승의 존재들을 연민하며 가엽게 볼 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럼에도 눈물은 미사가 끝나갈 시간 까지 줄기차게 흘러내렸다.

이승에서 늘 툴툴거리며 살았던 그는  이제 좀 편안히 살고 있을까.

저승의 법도에도 익숙해져가고 있을까.

 

미사를 드리며 '오병이어의 기적'을 떠올렸다.

오늘 미사에 몰려든 많은 영혼들이. 특히 가족들에게 잊혀지고 허기진 영혼들이

주님의 사랑으로 영혼의 양식을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 가득  그 양식이 남았기를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올리려니 잠시 멈췄던 눈물이 또다시 흘러내렸다.

요즘 가을 기운이 찾아들며 건조한 날씨에 입술과 목은 자주 마르는데,

내 눈물샘은 도무지 마를 줄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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