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방 풍경

어떤 가보

tlsdkssk 2009. 2. 26. 20:38

어떤 가보(家寶)

 

옛날에 한 형제가 서예가인 외숙부에게 휘호를 청탁하였다. 형이 받은 휘호는 ‘日新又日新’이었고 동생이 받은 휘호는 ‘川流不息’이었다. 형제는 각기 그 글씨를 액자에 담아 집에 걸었다.

동생이 형의 집에 갔다가 액자를 보며 말했다. “형님, 이 휘호 참 좋습니다. ‘날마다 새롭고 또 날마다 새롭다’이니 매일 아침 이 글씨를 마주하면 일하러 갈 기분이 절로 나겠습니다. 제 것은 ‘냇물은 쉬지 않고 흐른다.’입니다. 휴식 없이 일해야 하는 게 제 팔자인 것 같아 저는 그 글 앞에 서면 인생의 피곤함을 느낍니다. 형님 것 참 좋습니다.”

그 후 형이 동생 집에 들러 액자 앞에 섰다. “천류불사(不思)라!” ‘息‘을 ’思‘로 읽은 형은 몹시 감명을 받은 듯했다. “냇물은 생각하지 않고 흐른다. 하! 명문이다. 흐르는 물은 생각이 없다. 그렇지. 그저 흐르기만 할 뿐 생각할 게 뭐 있나!”

사연인 즉슨 이렇다. 형제의 외숙부가 이 글을 휘호할 때 ‘息’자의 첫 획을 삣침 별(丿)자로 시작하지 않고, 구절 찍을 주(丶)자로 시작한데다가 먹을 흠뻑 찍어 썼기 때문에 ‘恩’이나 ‘思’처럼 보인 것이다. 그런데 ‘불은(不恩)’으로는 뜻이 전혀 통하지 않으므로 동생도 ‘思’자로 읽었었다. 심오한 뜻이 담긴 동양철학이나 한시(漢詩)의 한 구절로 착각했던 것이다. 식(息)자로 바로 읽기까지의 잠깐 동안은 동생도 형과 유사한 생각을 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식 자로 바로 읽은 후에도 동생은 가끔은 그 휘호를 ‘천류불사’로 읽으면서 세상을 살았다고 한다.

 

고사(故事)인 듯한 위 이야기에는 ‘息‘자와 ’思‘자가 들어간 그럴듯한 고사성어 하나쯤 딸려 있을 법도 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이 얘기는 내 서재에 걸려있는 액자 휘호에 관한 것이다. ’옛날에‘로 시작하여 고사의 흉내를 낸 데는 이 휘호 하나가 내 생활철학에 고사만큼이나 의미 있는 생활의 예지로 작용해 왔기 때문이다.

가로로 쓴 4자 휘호의 끝에는 작은 글씨로 ‘己未歲暮丿爲丙泰君丿外叔’이라 적혀 있고 두 개의 낙관에는 ‘金圭晟’과 ‘閒山’이라고 찍혀 있다. ‘己未’는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해다. 3.1절 노래가사가 ‘기미년 3월1일 정오…’로 시작되어서이다. 독립만세사건이 일어난 그 기미년은 1919년이고, 같은 기미년은 60년을 주기로 한번 씩 돌아오니 내가 30대의 나이에 받은 이 글은 외숙께서 1979년에 휘호하신 것이 된다.

외숙께서는 국문학을 전공하셨으며, 명필이셨다. ‘息’자를 별(丿)자 획으로 시작하여 쓰지 않은 것은 이 서체가 행서체(行書體)이기 때문인데, 나는 그것을 최근에 서체에 관해서 공부를 좀 한 다음에야 알게 되었다. 한글세대이면서 한문을 따로 공부하지 않고 서예도 하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은 평이한 해서체(楷書體)로 쓴 액자에서도 모르는 글자가 있어 답답함을 느끼는 데다, 서체까지 난해한 글씨 앞에서는 속수무책이 되곤 한다.

오래 전 추사의 글씨 앞에서 지(芝)자를 못 알아본 것이 내가 액자글씨에 경외감을 느끼게 된 최초의 기억이다. 그것은 경외감이었음과 동시에, 모르던 글씨를 알아보게 되었을 때 명필에 대해 가지게 된 하나의 희열이기도 했다. 대학에 갓 입학했을 때였는데 집안 어르신 댁에 ‘芝山居’라고 써진 대형액자를 올려다보면서 그 첫 글자를 읽지 못한 것이다. 중학교 때 외운 ‘꽃다울 지’라는 그 글자의 훈(訓)과 음(音)이 떠오른 후에야 “꽃다운 산에 살도다. ‘지산거’라!” 하며 소리 내어 읽었다. 마치 춤을 추는 듯한 芝, 한껏 비뚤어진 형상의 山, 구도가 맞지 않는 居 (집채만큼이나 크게 보이는 ’戶‘속에 절구통만큼 밖에 차지하지 못한 크기의 ’古‘), 그 세 글자의 왼쪽 끝에 ’秋史‘라고 쓰여 있었다.

외숙의 글씨는 그 정도의 파격이거나 난해한 서체는 아니었지만, 순간적인 오독을 유발시킨 것은 오히려 내게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세월이 흐를수록 외숙께서 짐짓 그런 예상을 염두에 두고 쓰셨던 건 아닐까 하며, 일찍 혼자되신 당신의 누님과 그 슬하의 생질형제, 우리들에게 각별한 보살핌과 남다른 애정을 보이셨던 생전의 모습이 그리움으로 떠오른다.

川流不息! 쉼 없이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니, 그것은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진리일 것이다. 그 덕일까? 나는 지금껏 그 보편타당한 진리의 실천에 크게 어긋나게 살지는 않았던 것 같다.

川流不思! 작위하지 않는 무위자연, 노자는 도(道)의 본성을 자연이라고 하였다. 즉 물 흐르듯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유유자적함이다. 도에는 어떠한 의지와 목적이 없이 무위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천류불사가 아닌가.

無念無想! 생각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상태! 佛家에서 행하는 쉽지 않은 수행의 길!

‘주어진 인생이니 그냥 하루 넘기자. 목표고 무어고 오늘 하루를 그냥 때우는 거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도 오늘은 생각을 말자. 내가 옳으니, 네가 옳으니 유보를 해두자!’심신이 피곤한 때는 나는 그렇게 쉬었다. 그것은 포기와는 다른 자연에의 순응이었다.

 

집사람이 어느 날 말했다. 내 서재를 청소할 때마다 자기는 시외숙의 휘호액자를 가장 정성들여 닦아 왔노라고, 그 액자를 닦다보면 사람은 흐르는 냇물처럼 살아야 함을 생각하게 된다고, 늙더라도 사람은 보람 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찾아 생동감 있게 살아야 하며, 일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끈기와 꾸준함이라는 가르침을 배우게 된다고. 그리고는 이 액자를 거실에 옮겨 달자고 했다. 그것은 지금 거실에 걸려있는 가훈 이상으로 우리아이들에게 ‘천류불식’을 사랑하게 하자는 뜻이란다. 그 제안을 듣는 순간 나는 언젠가 계곡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에 지친 귀를 내맡겼을 때, 머릿속의 온갖 복잡한 것들이 사라지면서 무념무상에 빠져들었던 ‘천류불사’의 시간을 문득 떠올렸다. 아이들에게 ‘천류불식’을 사랑하게 하면서도, ‘천류불사’의 여유를 갖게 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息’자를 본다. 아니, ‘思’자를 본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팔짱 낀 채 있음을 뜻하는 불위(不爲)를 인생에서 늘 경계하라는 ‘不息’의 철학과, 지식, 법제, 인의, 예악 등 인간의 의식에 입각한 일체의 행위인 인위(人爲)를 부정하라는 ‘불사’의 철학, 그 두개의 상반된 철학을 한 글자에서 보는 것이다. 흡사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보는 듯하고, 음양을 하나로 투시하여 보는 듯하다. 아내의 제안대로 나는 이 액자를 거실에 내다 걸 생각이다. 낙관에서 이름과 호를 알아볼 수 있긴 하지만 휘호인의 자리에 이름 대신 ‘외숙’이라고만 쓰셨고, 또 내게 내리신 것으로 명기가 되어 있어, 나는 지금껏 거실에 걸 생각을 못했던 것이다. 이 액자를 보면 큰 뜻을 내게 남기신 외숙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품게 되니 역시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 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이제 이 액자가 거실에 옮겨지고, 우리 집을 찾는 이들이 이 글 앞에 설 때마다 나는 이 액자를 우리 집 가보라고 소개하려 한다. ‘식’으로 읽는 이에게는 ‘사’로 읽어보라 권하고, ‘사’로 읽는 이에게는 ‘식’으로 읽어보라 할 것이다. 그 상반되는 뜻의 묘미를 헤아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액자를 가보로 정한 나에게 고개를 끄득이며 공감해 주리라 믿는다.

- 1997년 겨울 -

후기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산을 천천히 오르는데 외숙께서 내게 주신 천류불식 때문이기도 하다. 천천히 오르지만 쉬는 경우는 없다. 쉴 때는 천류불사를 생각한다.

-2008년 5월- ( 200자 X 2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