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의 약속 / 문태준
마음은 빈집 같아서 어떤 때는 독사가 살고 어떤 때는
청보리밭 너른 들이 살았다
볕이 보고 싶은 날에는 개심사 심검당 볕 내리는
고운 마루가 들어와 살기도 하였다
어느날에는 늦눈보라가 몰아쳐 마음이 서럽기도 하였다
겨울방이 방 한 켠에 묵은 메주를 메달아 두듯
마음에 봄 가을 없이 풍경들이 들어와 살았다
그러나 하릴없이 전나무숲이 들어와 머무르는 때가 나에게는 행복하였다
수십년 혹은 백년 전부터 살아온 나무들, 천둥처럼 하늘로 솟아오른 나무들
뭉긋이 앉은 그 나무들의 울울창창한 고요를 나는 미륵들의 미소라 불렀다
한 걸음의 말도 내놓지 않고 오롯하게 큰 침묵인
그 미륵들이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하였다
그러나 전나무숲이 들어 앉았다 나가면 그뿐, 마음은 늘 빈집이어서
마음 안의 그 둥그런 고요가 다른 것으로 메꾸어졌다
대나무가 열매를 맺지 않듯 마음이란 그냥 풍경을 들어 앉히는
착한 사진사 같은 것
그것이 빈집의 약속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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