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김나영
이 남자다 싶어서
나 이 남자 안에 깃들어 살
방 한 칸만 있으면 됐지 싶어서
당신 안에 아내 되어 살았는데
이십 년 전 나는
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
옛 맹세는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고
사랑도 맹세도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간 자리
25평도 아니야
32평도 아니야
사네
못 사네
내 마음의 공허가
하루에도 수십 번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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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밖에 없었는데/ 지금은 나 당신 밖에 있네”라는 '동음이의(同音異義:pun)'가 참 절묘합니다. 무릇 세상 만물이 낡아가고 침윤되듯, 사랑의 맹세 역시 “헌 런닝구처럼 바래어져” 가거나, “뱀허물처럼 쏙 빠져나가” 버리고 마는 것인가 봅니다. 안쓰러운 일이지만, 이렇듯 생의 부박(浮薄)함을 들여다보는 일이 시인의 전유물인 것만은 아닐 테지요.
그렇습니다. 마음의 공허란 결단코 25평이네, 32평이네 하는 아파트 크기로 채워질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기왕에 “하루에도 수십 번 마음의 이삿짐을 쌌다 풀었다” 하실 거라면, 오히려 그 흔들림을 거름삼아 이슥한 ‘큰 긍정’의 마음 숲에 이르시길 바랍니다. 부질없음과 흔들림을 넘어서는 사랑이 더 크고 강한 사랑이라는 역설을, 우리는 ‘살아내야’ 하는 것이 아닐는지요. <매일신문 엄원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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