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스크랩] (테마-사랑, 연재 1)허수경, 흰 꿈 한 꿈

tlsdkssk 2009. 3. 20. 06:30

흰 꿈 한 꿈

 

혼자 대낮 공원에 간다

술병을 감추고 마시며 기어코 말하려고

말하기 위해 가려고, 그냥 가는 바람아, 내가 가엾니?

 

삭신은 발을 뗄 때마다 만든다, 내가 남긴 발자국, 저건 옴팍한 속이었을까, 검은 무덤이었을까, 취중두통의 길이여

 

고장난 차는 불쌍해, 왜?

걷지를 못하잖아, 통과해내지를 못하잖아, 저러다 차는 썩어버릴까요

저 뱀도 맘이 아파, 왜?

몸이 다리잖아요 자궁까지 다리잖아요 그럼,

얼굴은 뭘까?

사랑이었을까요......

아하 사랑!

마음이 빗장을 거는 그 소리, 사랑!

 

부리 붉은 새, 울기를 좋아하던 그 새는 어디로 갔나요?

그런데 왜 바보같이

벌건 얼굴을 하고 남몰래 걸어다닐 수 있는 곳만 찾아다녔지?

 

그 손, 기억하니?

결국 마음이 먹은 술은 손을 아프게 한다

이 바람......

 

내 마음의 결이 쓸려가요 대패밥 먹듯 깔깔 하게 곳간마다 손가락, 지문, 소용돌이, 혼자 대낮의 공원

 

햇살은 기어코 내 마음을 쓰러뜨리네

 

당신.....

 

- 허수경 詩, 『혼자 가는 먼 집』,문학과 지성사, 1992.

 

이 시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이 구절 때문이다.

“고장난 차는 불쌍해, 왜?/

걷지를 못하잖아, 통과해내지를 못하잖아, 저러다 차는 썩어버릴까요/

저 뱀도 맘이 아파, 왜?/

몸이 다리잖아요 자궁까지 다리잖아요 그럼,/

얼굴은 뭘까? /

사랑이었을까요....../

아하 사랑!/

마음이 빗장을 거는 그 소리, 사랑!”

 

시인은 고장난 차를 보고 불쌍한 느낌이 든다. 사람이 타는 차, 생명이 없다. 그러나 사람과 함께라면 무서운 속도로 도로를 질주한다. 따스한 온기, 생명이 있는 사람이 와서 안기면 차는 살아나 도로를 질주한다. 그러나 고장 난 차는 생명의 따스한 온기로도 도로를 통과해내지 못한다.

 

저러다 썩어버릴까? 시인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시인은 생명을 떠올린다.

살아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물음 속으로 뱀이 스며든다. 왜 하필 뱀일까? 생명의 근원, 생명이 가진 것 중에 가장 보호 되어야 하는 자궁을 흙바닥, 썩은 나뭇잎, 고인 물 위에 비비며 기어나가는 뱀은 가장 치열하고 처절한 삶의 모습이 아닐까?

 

그 질기고 치열한 생명에서 시인은 사랑을 본다.

 

사랑이라는 말은 아마 지금 혹은 이전의 누군가를 떠올리게 할 것이다. 그 사람의 얼굴을.

시인은 그래서 ‘얼굴은 뭘까?’하고 되뇌었을 것이다.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시인이 본 사랑은 우리가 알고 있는 명사, 사랑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의태어 ‘사랑’이다. 거대하고 육중한 나무로 짠 대문에 빗장을 거는 소리 말이다. 시인은 들려준다 ‘사라락~’하는 그 울림을. 그것을 시인은 ‘사랑’ 이라는 울림으로 말한다. 시인이 울린 ‘사랑~’이라는 울림은 독자에게 닿아 사랑의 맹목, 단절, 보호, 집착 등등의 감정으로 확장되어 계속 새로운 울림을 자아낸다. 사랑을 하면 그 사람에게 집중하게 되고, 때로는 이전의 다른 일들, 친하게 지내던 사람들에게 소홀해지기도 하고,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늘 위로가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믿음 등등, 이전의 세계에 마음을 닫고 새로운 세계로 마음을 여는 행위가 사랑이라면 빗장을 지르는 것 역시 사랑과 같은 행위라고 들리는 듯하다. 

 

그래서 빗장을 거는 소리 ‘사랑~’으로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빗장을 지르는 마지막 울림 ‘탁!’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이 철렁내려 앉는, 사랑의 처음 순간과 마지막 순간까지를 오롯이 빗장을 지르는 ‘사랑’이라는 소리에 담아내고 있다. 새삼 詩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다.

 

출처 : (테마-사랑, 연재 1)허수경, 흰 꿈 한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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