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볼 일이 있어 3박 4일 머물고 왔다.
하지만 서울을 떠날 때 부터 내 맘은 볼 일 보다 한라산에 있었다.
마침 제주의 K 시인이 등반 안내를 해주겠다기에 든든하였다.
한라산 등반은 일반적으로 <영실>에서 오르는 구간과,
<어리목> 이나 <성판악> 혹은 <관음사>에서 가는 코스가 있단다.
K 시인은 영실에서 가는 구간을 추천했으나,
그 쪽은 눈 사태로 통행이 불가능 하여 포기하고 어리목으로 가려 했으나,
그쪽 가는 버스는 배차 간격이 1시간이나 되어 성판악 코스로 정했다.
<성판악 휴게소 입구. 쌓인 눈이 사람 키를 넘는다.>
날씨는 더 없이 맑고, 기온은 봄날처럼 포근하여
온 한라산이 나를 반겨주는 듯 했다.
K 시인은 전형적인 제주인의 틀을 갖추고 있다.
제주인은 일반적으로 키가 작고,
머리가 큰 사람이 많이 보인다.
시인의 말로는 제주 남자는 무드 없고, 제주 여인은 매너 없다나. 정말?
무드 없는 이 제주 남자는 성판악 휴게소 입구 까지는 나를 잘 인도해주었다.
한데 어쩐 일로 산을 오를수록 걸음이 쳐지며 볼 일을 핑게로 돌아가자고 한다.
눈치를 보니 어째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흠, 날더러 성판악 코스는 길이 완만하여 잼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난 매너 없는 여자가 되어 그를 제쳐두고 혼자 걸었다.
"이건 산보지 산행도 아니네요."
약좀 올려주자 그도 오기가 나는지,
"맞습니다. 이건 산보예요." 한다.
난 속으로 ㅋㅋㅋ 웃었다.
호랑이 없는 곳에선 토끼도 왕노릇 한다는 말이 참말 맞는다.
서울산행클럽에선 내가 늘 꼴찌인데, 이 사나이는
나를 기이하다는 듯 바라보지 않는가.
조금 더 오르니, 아래 사진과 같은 설경이 내 눈을 압도한다.
맘 같아선 백록담까지 오르고 싶은데,
성판악 백록담 코스는 왕복 9시간 구간인데다,
오후엔 나도 만날 사람들이 있어 진달래 밭까지만 가기로 했다.
제주 인들이 한라산을 제대로 보는 날은 1년에 44일 정도라고 한다.
한데 내가 가 있는 동안은 제주의 날씨가 맑아
어딜 가나 한라산 정상이 또렷이 보였다.
날씨는 서울의 봄날처럼 포근하여 겹겹이 입고간 옷들을 하나하나 벗기 시작했다.
겹겹이 둘러싼 오름들 위로 우뚝 선 정상은 마치 흰 모자를 씌어 놓은 듯
신비하게 보였으나, 방향 관게로 카메라에 잡지는 못한 겟이 아쉽다.
1시간 정도 올라 오니 침엽수 길이 나온다.
제주 사나이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기다라고 있으려니,
얼마후 그가 나타나, 사진이나 찍고 내려 가잔다.
길이 아닌 곳을 디디면 내 허벅지 까지 눈이 쌓여 있다.
첫날은 이 구간에서 30분 정도 더 올라갔다가 함께 하산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에 만나기로 한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린다나.
한데 알고 보니 그 말은 거짓이었다.
존심상 힘들다는 말은 못하겠으니 둘러댄 모양이다.
<좋습니다, 내려갑시다>
<내가 만난 제주 사람들.
음악인도 있고, 작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 간호사도 있고...
한데 뒷줄의 두 남자 코를 보시라, 마치 돌하루방 같지 않은가.
K시인은 이들과의 회식 관게로 일찍 내려 왔다고 했으나,
이들은 모두 늦게 와주었다.>
**
이튿날 그 사나이에게 다시 한라산에 오르자고 했더니
그는 펄쩍 뛰며, 시시한 산행( 정말 웃기시네)은 관두고 <우도>에나 가자고 한다.
난 섬 관광보다 눈덮힌 한라산에 혼이 빠져 있었기에,
결국 나 혼자 행동하기로 했다.
전날 조금 걸어 봤으니, 겁날 게 없었다.
그리고 떠벌이(?) 제주 사나이와 함께 가는 것보다
혼자 묵묵히 산을 감상하는 게 훨 좋을 것 같았다.
<침엽수들은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만큼 눈송이를 덮고 있다.
예서 제서 후둑 후득 눈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고,,,>
<한라의 하늘은 시리듯 푸르고, 잎새 한 점 안남은 나무들은 봄을 기다리고 있다>
<눈 위엔 까마귀 발자국과 짐승이 지난간 흔적이 남아 있다.
한라산 새들은 다 어디로 숨었는지 온통 까마귀 세상이었다.>
<혼자 진달래밭을 오르며 바라본 한라산.
등산객의 발걸음이 끊어지면 온산이 쥐죽은 듯 고요해
나 혼자의 세상이 되어 주었다.>
산행을 시작한 시각은 오전 10시 30분이었는데,
오후 2시가 넘자 체감으로 느껴지는 온도가 갑자기 서늘해지기 시작했다.
평지라면 지금이 한창 따듯할 시간인데,
갑작스런 기온 하강에 겁이 나기 시작했다.
벗었던 옷들을 다시 끼어 입었다.
보폭을 빨리하며 자꾸 시계를 바라보았다.
하산 하려면 2시간 30분 정도는 족히 내려가야 하는데,
핸드폰을 집에 놓고 오는 바람에, 만약의 사태에도 도움을 청할 길이 막막하지 않은가.
백록담에 못오른 건 아쉬었지만 분주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동작을 빨리 하니 다시 땀이 쏟아지고 목이 타기 한다.
준비해간 물이 바닥 나, 지천으로 쌓인 눈을 뭉쳐 먹었다.
몇 십년 만인가. 내가 눈맛을 본 것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눈맛이 더 없이 담백하고 순하다.
나는 다시 눈을 꽁꽁 뭉쳐 입안 가득 넣었다.
깨물어 먹으니 귓전으로 뽀드득 뽀드득 눈 밟는 소리처럼 들려 온다.
발 밑에서도 뽀드득, 뽀드득
입 안에서도 뽀드득, 뽀드득.
완전 음체 음향이다.
얼만치 내려 오자, 웬 남자가 눈을 소세지 같이 길게 뭉쳐 맛나게 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도 제주 남자인가, 틀은 작달막 하고, 코는 두루뭉실 한 것이 어딘가 코믹하고 순하게 보인다.
그는 내 인기척이 느껴지자 웬일로 머쓱해하며 얼른 눈뭉치를 감춘다.
왜? 도대체 뭐가 부끄러웠을까? 나도 먹었는데...
내 입안에도 눈덩이가 그득했던 터라 난 속으로 웃었다.
맘 같아선 그의 귀여운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싶었으나, 내 눈속으로만 담았다.
자꾸 웃음이 새어나왔다.
감춰도 보일 건 다 보였는데...
**
<혼자 산길을 내려오다 내 그림자를 바라보니 흡사 유령 같이 보인다.
안녕, 한라산.>
백록담에 못 오른 대신 서귀포로 돌아가 이중섭 거릴를 산보했다.
<화가 이중섭이 거처했던 사귀포의 작은 오두막>
나는 이곳을 두 번째 찾았는데, 이번에도 역시 가슴이 시큰했다.
<이중섭 가족이 1년 남짓 살았던 1.4평 짜리 방>
<중섭의 오두막에서 바라본 서귀포 항과 섶섬.
중섭이 그린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란 작품을 보면 지금과는 아주 딴판이다.
초가가 듬성듬성 보이고, 바다는 인가와 한층 더 가깝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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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1E.tmp.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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