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한 지붕에 살았던 남**씨는
스페인 사람을 연상시키는 강열하고도 개성적 용모에,
뮤지컬 스타 남경주를 닮은 체구에,
대단한 미성과 가창력을 가진 재주꾼이었다.
그의 부친은 금식기도를 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할만큼 열열한 크리스챤이었는데,
그의 형제들은 뭐든 치열하게 파고드는
근성을 지니고 있어, 뭔가 천재적인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었다.
남편과 나는 그의 재질을 아꼈고, 그의 노래를 좋아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세 사람이 남게 되면 그는 곧잘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전곡을 독어로 부르곤 하였다.
김자경 오페라단의 말단 단원으로 적을 두고 있었지만,
우리는 그가 어느 성악가 못지 않은 재질을 갖고 있음을
믿어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모든 제도권의 장벽은 높았다.
그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음대를 졸업한 입장이 아니었기에,
성악가로서 그의 앞길은 열려지지 않았다.
그 때 생각한 것이 탱고 음악이었다.
탱고 가수가 없는 한국 땅에 탱고 붐을
일으켜보는 건 어떨까.
마침 외모조차 라틴계를 연상시키니,
금상첨화 아닌가.
당시 최양숙인가 하는 서울대 출신(?)인테리 여성이
샹송가수로 활약하기도 했기에,
탱고도 먹히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클래식에서 탱고로 바꾸는 것이
무슨 순결이라도 잃는 것처럼 그는 괴로워 하였다.
하지만 끝내는 그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오페라단 단원 생활로는 생활이 안되었고, 동업한
부틱도 파리만 날리는 입장이었다.
어느 추운 겨울 날 밤이었다.
세 사람은 사직공원 벤치에 앉아 덜덜 떨며
공연회(?)를 준비하고 있었다.
관객이라고는 두 사람밖에 없는 밤공원에서
그는 <라 쿰파르시타>를 열창하였다.
좀전까지만 해도 덜덜 떨리던 몸이 그의 노래를
듣는 순간 후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남 **, 그는 <라 쿰파르시타>로 널리 알려진 가수
'티토 스키파'보다 더 애절하게
그 노래를 불러주었다.
그래, 클래식이 아니면 어떤가,
저토록 가슴을 절절히 울리는데...
나는 그에게 앵콜을 부탁했다.
어찌나 감동적인지 그의 노래가
뼈속까지 파고 들어 뼈마디까지 저려오는 듯 했다.
융통성 없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인간은
결국 세속에서 밀리기 마련인가 보다.
그는 끝내 가요계 데뷰 조차 하지 못하고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말았다.
훗날 그는 남미 맥시코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목사가 되어 한국 땅을 밟은 적이 있었다.
<풀무원>의 사업을 배워 원주민들에게 적용해보려는
의도를 품고 귀국했다고 하였다.
20대에 헤어진 우리는 40중반이 넘은 나이에 서로 만났다.
그러나 20여년의 세월은
그를 너무도 다른 인간으로 바꿔 놓았다.
일단 그는 모든 세속적 얘기를 피하였다.
우정도 추억도 탈색이 된 채 오직 예수 얘기다.
우리 부부는 차를 몰아 풀무원으로 인도하면서
옛 추억에 잠겼다.
내가 조심스레 그에게 청했다.
"아무 노래든 하나만 불러주실 수 있어요?"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
"전 이제 노래 못합니다. 예수 아니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는 마치 예수병 환자로 보였다.
아니, 그 누가 보아도 예수병 환자였다.
열심한 신앙과 광신은 분명 그 맥을 달리하는 법.
한데 그는 세상과 신앙을 이분법적으로 철저히
양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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