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신데렐라

tlsdkssk 2021. 1. 19. 08:39

재투성이 아가씨

신데렐라

짚신도 짝이 있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일생에 한번쯤은 언젠가 만나게 될 짝 찾기에 골몰한다. 정말 우리는 제대로 된 짝을 찾기만 하면 이 세상에서 별 탈 없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신데렐라 이야기가 그 전형이라 할 만하다. 다 알다시피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못된 계모와 의붓 언니들 아래서 갖은 고생을 한 신데렐라가 요정의 도움으로 참가하게 된 무도회에서 왕자님을 만나고, 급하게 집으로 돌아가다 떨어트린 구두 한 짝이 인연이 되어 왕비가 된다는 내용이다. 물론 끝은 해피엔딩이다.

콩쥐팥쥐 이야기를 듣고 자란 우리에게 이 이야기는 마치 서양판 콩쥐 이야기처럼 들린다. 콩쥐 역시 팥쥐 모녀의 구박을 받으며 지내다 냇가에 떨어트린 꽃신 한 짝이 인연이 되어 사또의 처가 되니 말이다. 두 이야기 모두 젊고 아름답지만 불우한 환경에 처한 여성이 우연한 계기에 신분상승을 이루는 이야기로 해석되곤 한다. 또는 불우한 환경을 탓하지 않고 착하게 맡은 임무를 충실히 행하면 언젠가 복을 받게 된다는 교훈담으로 읽히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신데렐라류 이야기가 꼭 그런 식의 순응적인 도덕관만을 전파하는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우리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주로 월트디즈니사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신데렐라〉다. 애초에 극장판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된 이 작품은 종이 그림책으로 편집되어 아이들에게 널리 읽혔다. 분홍색 드레스를 입고 위로 올린 금발 머리의 아가씨가 호박 모양의 황금 마차를 타고 무도회에 간다. 왕자님은 18세기 유럽의 군주들이 입던 금장 단추가 달리고 몸에 딱 달라붙는 의장용 군복 차림이다. 요정 할머니가 전해준 신데렐라의 신발은 하얀색 유리구두다. 이 그림책 덕분에 아이들은 분홍색 드레스 차림을 꿈꾸고 신데렐라는 공주라는 신분으로 탈바꿈한다.

여자 아이들은 언젠가 만나게 될 부유하고 멋진 외모의 왕자님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고 자라며 아마도 남자 아이들은 그런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될 날을 꿈꾸는지도 모른다. 동화가 현실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살아 있는 디즈니랜드인 할리우드와 연예계에서는 실제로 이런 드라마가 자주 일어나기도 한다. 물론 현실 속 신데렐라는 못된 계모에게 구박을 받으면서 살지도 않고 그렇게 유별나게 착하지도 않다. 다만 어찌어찌해 꿈같은 신분상승의 드라마가 펼쳐지곤 하는 것이다. 현실 속의 신데렐라는 오히려 왕자의 간택을 받기 위해 뒷바라지하는 엄마를 필요로 하는 두 언니 캐릭터를 더 닮았다.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원래의 ‘신데렐라’와는 많이 동떨어진 현대판 변형이다.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며 살아남은 이야기인 신화가 때와 장소에 따라 변형되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현대판 신데렐라 이야기는 다른 때, 다른 장소에서 이야기되던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신화적 깊이는 사라지고 자본주의적 현실논리만을 반영한 얄팍한 드라마로 바뀐 듯 보인다.

여러 신데렐라 이야기 중 디즈니판 신데렐라가 놓치고 있거나 애써 감추고 있는 부분이 잘 드러난 것은 그림형제가 정리한 신데렐라다.1) 그림형제판 신데렐라에서 멋진 옷과 구두를 가져다 줘 그녀를 변형시키는 존재는 요정할머니가 아니라 어머니 무덤 위에서 자란 개암나무다. 그녀가 신고 있던 신발도 유리구두가 아니라 황금신이다. 더구나 맞지도 않는 황금신에 발을 집어넣기 위해 두 언니는 엄지발가락과 뒤꿈치를 잘라 내야만 했다. 왕자는 황금신의 가짜 주인들을 진짜로 오인해 왕궁으로 동행하지만(참 어리석은 왕자다. 춤을 같이 추고 반한 여자도 못 알아보다니) 정작 그들의 정체를 알려 준 것은 비둘기들이다. 나중에 이 비둘기들은 신데렐라의 결혼식에 참석한 두 언니의 눈을 파먹어 버린다. 무엇보다도 신데렐라의 진짜 이름은 ‘재투성이’다.

겉보기에 순응적 삶을 택한 젊은 여성의 사회적 신분상승 이야기처럼 보이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그 배면에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린이용 동화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을 비웃기나 하듯이 잔혹한 부분 투성이다. 잔혹성으로 따지면 우리네 콩쥐팥쥐 이야기도 별로 떨어지지 않는다. 콩쥐 이야기의 후반부에서 콩쥐는 팥쥐 모녀에게 살해당한 뒤 다시 살아나 팥쥐를 죽여 젓갈을 담가 먹는 복수를 서슴지 않는다. 이런 잔혹함을 담고 있는 이야기가 왜 설탕과자처럼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기만 한 이야기로 바뀌었을까? 신데렐라나 콩쥐팥쥐는 모두 신화적 속성을 지니고 있는 이야기지만 그것이 권선징악류의 얄팍한 교훈담으로 전락하면서 이야기가 지닌 원래의 생생함을 거세당하고 만 것이다.

알렉산더 자크, 〈신데렐라〉, 19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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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때론 지배도덕을 전파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형되기도 하지만 신화가 전하는 원형적 차원의 의미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설정해 놓은 사회적 규준이나 도덕률 차원을 넘어 살아 숨 쉬는 자연적 욕망과 우주적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적 세계는 생각만큼 부드럽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신데렐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신데렐라 이야기가 전하려고 하는 내용이 순응적 도덕관이나 현실 속 제짝 찾기가 아니라면 대체 뭘 전하려 했을까? 우선 주목할 것은 그녀의 이름이 ‘재투성이’라는 점이다. 그녀가 ‘재투성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자신을 낳아 준 엄마가 죽고 못된 새엄마와 의붓 언니가 집을 차지하고 나서부터다. 그때부터 그녀는 원래 자신의 것이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어머니의 따스한 사랑, 제대로 된 옷과 음식, 잠자리 등 일상생활에서 중요시되는 모든 것을 박탈당한 채 아궁이 옆에서 재를 뒤집어 쓴 채로 지내게 된다. 새엄마는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아야 한다’는 청교도식 도덕관을 들이대며 그녀를 곤궁한 노동의 세계로 내몰고 그녀는 현실적인 모든 부와 풍요가 박탈된 공간에서 재투성이로 살아간다.

그녀는 현실 논리로 볼 때 실패한 자, 바깥으로 밀려난 자다. 바깥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죽은 이의 무덤, 개암나무, 산비둘기, 시궁쥐와 도마뱀 등이다. 여기가 바로 재의 세계다. 마치 죽어 있는 듯 보이는, 아무런 빛을 발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저편의 세계인 셈이다. 이 세계는 현실 논리 속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는 신데렐라가 입은 누더기 옷의 색깔처럼 눈에 띄지 않는 세계, 흐릿한 세계다.

한편 ‘재투성이’의 저편 세계와 대비되는 이편 세계는 새엄마와 의붓 언니들의 세계다. 그녀들은 현실을 움직이고 있는 노동윤리를 들먹이지만 정작 자신들은 불평등한 노동의 수혜자로 군림한다. 그녀들은 매일 몸매 가꾸기와 옷치장, 화장에 골몰해 있고 아버지에게 멋진 옷과 보석을 선물로 요구한다. 선물로 무엇을 받고 싶냐고 묻는 아버지에게 재투성이는 ‘아버지의 모자에 부딪치는 어린 나뭇가지’를 부탁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그녀는 할 수 없이 밀려나 저편의 세계에 거주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내면에는 재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축복과 보물을 알아보고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서로 다른 이미지의 두 선물은 이편의 문명과 저편의 자연을 은유했다고 풀이할 수 있다. 어린 나뭇가지를 선물로 요구했을 때 신데렐라는 저편 세계인 자연과의 연결을 유지하고 있는 자다.

아버지에게서 받은 개암나뭇가지를 그녀는 어머니 무덤 위에 심는다. 개암나뭇가지는 여기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신목과 같은 역할을 한다. 신데렐라는 개암나무 앞에서 매일 엄마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리고 나무는 신데렐라의 눈물을 먹고 자란다. 그렇게 자라난 개암나무가 나중에 신데렐라의 소원을 들어주게 된다.

개암나무는 우리에게 헤이즐넛(Hazelnut)으로 더 잘 알려진 고대 켈트족의 신목이다. 이 나무가 현실에 풍요를 가져다주는 통로 역할을 떠맡는 것이다. 신목, 말하자면 우주목은 나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상징적 나무다. 무덤 위에서 자라난 개암나무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저쪽 세계와 살아 있는 신데렐라가 거주하는 이쪽 세계 양쪽에 걸쳐져 있다. 이 공간은 이승과 저승, 죽음과 탄생, 문명과 자연,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등 우리의 이원적 지각과 판단의 한계 너머 하나로 얽힌 세계를 드러낸다. 여기서 바로 신화적 ‘변형’이 일어난다. 신데렐라는 이 개암나무 밑에서 소원을 말한다. “나무야, 너를 흔들고 뒤흔들어, 금과 은을 내 위에 내려다오.” 그녀는 이 장소에서 재투성이에서 황금신을 신은 사람으로 변한다.

이렇게 볼 때 이 이야기는 황금과 재로 대표되는 두 세계의 공존과 합일에 대한 이야기를 숨기고 있다. ‘재투성이’ 이야기는 분리된 두 차원을 움직이면서 펼쳐진다. 평상시에는 부엌의 아궁이 구석을 지키고 있는 소녀가 개암나무 아래에서 황금신을 신은 빛나는 여인으로 변모한다. 신데렐라는 한편에서는 재투성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빛나는 존재다. 우리의 발이 둘이고 신발이 두 짝인 것처럼 우리 존재는 이원적 차원을 걷는 존재다. 그녀는 재의 공간과 황금의 공간을 오간다. 그녀는 두 세계를 마음껏 오가면서 양쪽 신발을 제대로 신은 자다. 그래서 황금신은 그녀에게는 꼭 맞지만 언니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언니들은 재의 세계를 거치지 않고 곧장 황금의 세계로 향하려 했기 때문이다. 맞지도 않는 신발을 억지로 신으려 발을 잘라 낸 언니 일행에게 비둘기들이 속삭인다. “돌아서서 쳐다보렴. 돌아서서 쳐다보렴. 신발 안에 피가 흥건하구나. 신발이 너무 작다네. 진짜 신부는 아직 제 집에 있다네.”

나뉜 두 세계가 하나로 겹쳐지는 사건은 결혼식으로 표현된다. 신화적 결혼은 이원적 세계의 합일을 의미한다. 두 세계를 넘나드는 ‘재투성이’는 결혼잔치에서 짝을 만나 춤을 추고 결국 결혼에 이르지만 한쪽 세계에 고착되어 있던 두 언니는 산비둘기들에 의해 두 눈을 파먹혀 장님이 된다. 그들은 보지 못한 자, 볼 수 없던 자들이기 때문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를 세계의 이원적 차원에 대한 은유로 볼 때 그녀가 벗어 놓은 신발 한 짝은 다른 의미를 드러낸다. 신발 한 짝은 세속적 차원의 제짝 찾기라는 의미를 넘어서 우리 존재의 이중적 차원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해석된다. 한 쪽 신발을 잃어버린 채 걸으면 우리는 절뚝거릴 수밖에 없다.

신발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는 신데렐라뿐 아니라 그리스 신화 속 이아손 이야기에도 등장한다. 이아손은 왕자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사악한 숙부에 의해 왕위에서 물러나는 바람에 왕자인지도 모르고 숨어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다. 장성한 이아손은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묻게 되고 결국은 자신의 잃어버린 자리를 찾으러 숙부 펠리아스(Pelias)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강물 앞에서 한 노파가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한다. 이아손은 노파를 등에 업고 물살을 헤쳐 나가다 그만 신고 있던 샌들 한 짝을 잃어버리고 만다. 이아손은 하는 수 없이 한쪽 샌들만 신은 채로 펠리아스 왕 앞에 서게 된다.

한편 펠리아스는 ‘샌들 한 짝만 신은 자(monosandalos)’가 나타나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는다. 이 신탁은 헤라의 신탁이었고 이아손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넌 노파 역시 헤라 여신의 현신이었다. 이때 ‘모노산달로스’로서 이아손은 아직 자신의 정체가 완성되지 않은 자다. 그가 왕위를 되찾는 것은 펠리아스가 요구하는 과제를 해결하고 무사히 귀환하고 나서다. 잃어버린 신발 한 짝은 그의 절반짜리 정체성을 나타내며 그의 앞에 펼쳐질 삶의 여정은 나머지 신발 한 짝을 되찾는 길이기도 하다. 이아손은 메데이아의 도움으로 왕위를 되찾기 위해 필요한 황금양털을 되찾아 오는 데 성공하지만 결국에는 메데이아를 배반하고 자식들을 모두 잃은 후 혼자 쓸쓸한 노년을 보내다 자신이 만든 배인 아르고 호의 썩은 나무토막에 깔려 숨을 거둔다.

신발 한 짝으로 걷는 그는 영원한 절름발이인 셈이다. 신발로 표현되지는 않았지만 일종의 모노산달로스라 할 수 있는 인물 중에 하나가 오이디푸스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한쪽 발이 상자에 못 박혀 버려진 까닭에 ‘발이 부은 자’란 뜻의 ‘오이디푸스’란 이름을 갖게 되었다.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알지 못한 채로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가혹한 운명의 주인공이다. 그는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두 눈을 찌르고 딸과 함께 황야로 방랑의 길을 떠난다. 이때 절름발이 인간, 오이디푸스는 반쪽짜리 진실에만 눈을 뜬 자, 그래서 결국은 눈을 찌르고 눈으로 보이는 세계 너머로 나아간 자의 표상이다.

익숙한 콩쥐류의 이야기 말고 또 다른 신데렐라 이야기를 살펴보자. 이 이야기를 소개한 나카자와 신이치는 북아메리카 원주민 부족의 하나인 미끄마끄족이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오기 시작한 초기에 프랑스인들과 교류하면서 샤를 페로(Charles Perrault)가 정리한 ‘신데렐라’ 이야기를 듣고 자신들 나름대로 이야기를 변형시켜 구조적으로 비슷하지만 다른 지향점을 향하는 세련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고 한다.

호숫가 저편 오두막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훌륭한 사냥꾼이기도 했으므로 마을의 젊은 아가씨들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했다. 그런데 그가 내세운 조건은 자신을 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여동생은 그와 결혼하고 싶어 하는 아가씨에게 그가 보이는지 묻는다. 그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 무슨 띠를 둘렀는지 등등을 말이다. 하지만 거의 모든 젊은 여자는 그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고 그냥 거짓말로 둘러대기 일쑤였다.

마을에는 언니들의 학대로 얼굴에 화상을 입은 소녀가 살고 있었다. 그녀도 이 시험에 참가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녀는 아버지가 물려준, 발에 맞지도 않는 커다란 모카신을 물에 불려 오그라뜨려 신고 나뭇가지를 여기저기 얽어 만든 옷을 입고 그를 찾아간다. 그가 무엇을 입고 있느냐는 누이동생의 물음에 그녀는 답한다. ‘그는 무지개 띠를 입고 있어요. 그의 말채찍에는 은하수가 달려 있어요.’ 그녀는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볼 수 있었고 그의 오두막에 초대된다. 여동생은 오두막에 들어온 그녀를 잘 씻겨 머리를 빗기고 장신구를 해주었다. 그러자 화상을 입어 생긴 얼굴의 흉터는 말끔히 사라졌고 헝클어진 머리는 흑단처럼 빛이 났다. 그녀는 오두막 안에서만 보이는 ‘보이지 않는 사람’의 옆자리에 앉았고 그는 기쁘게 제짝을 맞이했다.

샤를 페로판 신데렐라의 패러디로 여겨지는 이 이야기는 유럽판 신데렐라가 담고 있는 얄팍함을 적당히 비꼬는 이야기다. 젊은 여성을 기다리고 있는 남자는 여성의 치장과 외모에 반해 그녀를 찾아다니는 어리석고 어린 남자가 아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면모를 볼 줄 아는 여성, 말하자면 지혜로운 여성, 또는 영적인 시각을 갖춘 여성을 기다린다. 그녀의 눈에는 무지개 띠와 은하수가 달려 있는 말채찍이 보인다. 무지개와 은하수는 우주적 이미지다. 신발 역시 황금신도 유리 구두도 아닌 큼지막한 모카신이다. 화려하지도 비싸 보이지도 않는 허름한 모카신을 그녀는 자기 발에 꼭 맞는 것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 이야기 속에서 그녀는 굳이 신발 한 짝을 흘릴 필요가 없다. 그녀는 이미 완성되어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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