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테의 ‘신곡’은 수많은 번역서가 있는데 허인(동서문화사) 완역본이나 박상진(서해클래식)의 축약본을 보면서 김운찬의 ‘신곡 읽기의 즐거움(살림)’을 읽으면 이해가 쉽다. ‘신곡’의 영어 번역자 도로시 세이어즈는 ‘신곡’을 읽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처음부터 끝까지 곧장 읽는 것이라고 조언한다.
“인생의 중반기에 올바른 길을 벗어난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어두운 숲이었다. 그 가혹하고도 황량한, 준엄한 숲이 어떠했는지는 입에 담는 것조차 괴롭고 생각만 해도 몸서리친다. 그 괴로움이란 진정 죽을 것만 같은 것이었다.”
단테의 ‘신곡’은 이렇게 시작한다.
단테(1265~1321년)가 ‘지옥’ 편을 구상하기 시작했던 시기는 39살인 1304년 무렵이라고 한다. 그가 37살에 피렌체로부터 추방당해 2년째 유랑 중이었던 시기다. 인생의 중반기란 바로 그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 혼란함과 신산함, 괴로움이 바로 ‘신곡’의 첫 문장에 그대로 응축돼 있다.
유랑은 그가 세상을 뜬 1321년까지 끝나지 않았고 ‘신곡’은 그 유랑을 자양분으로 삼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남았다. 사마천이 말한 이른바 ‘발분저서’인 것이다.
단테는 ‘천국’ 편을 빌려 자기를 추방한 피렌체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오랜 세월 뼈를 깎는 듯한 고생을 거듭해 몸도 야위었지만, / 그 옛날 아직 어린 양이었던 시절 / 저 아름다운 양 우리(피렌체)에서 자던 나를 몰아낸 / 흉악한 이리들의 잔혹무도함을 / 만약 이 시가 무찌를 수 있다면 / 그때는 목소리도 머리털도 이미 변해버렸을 것이지만, 나는 / 거기 시인으로 되돌아가 나의 세례당의 우물가에서 / 머리에 관을 쓰게 되리라.”
추방의 고통이 단테에게 얼마나 사무쳤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결혼해 부인과 세 자녀와 단란하게 살며 정치적 야망을 불태웠던 37세(1302년)의 단테가 하루아침에 정변에 휘말려 국외 추방자 신세가 됐으니 그럴 만도 하다 싶다.
추방 생활을 견디게 해준 것은 다름 아닌 베아트리체였다. 그에게 베아트리체는 구원과도 같았다. 단테의 문학은 베아트리체의 사랑으로 이뤄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9살에 만나 18살에 재회하지만, 22살에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25살에 죽은 베아트리체를 단테는 잊지 못했다. 단테가 창조한 베아트리체의 형상은 모든 문학사상에서 가장 유명한 허구의 여인 가운데 한 사람이다. 18살 때 어느 날 오후 3시, 우연히 길에서 마주친 이들의 조우를 영국 화가 헨리 홀리데이가 화폭에 남겼다.
‘신곡’을 떠받치는 형식과 구조는 웅장한 건축물을 상기시킨다. ‘신곡’은 지옥과 연옥, 천국 편으로 이뤄진 방대한 서사시다. 각기 서른세 편의 곡으로 구성되며 지옥 편에는 서곡이 추가돼 모두 100곡을 이룬다.
그가 아버지처럼 존경하던 베르길리우스가 길잡이로 나타나고 그들은 함께 지옥과 연옥을 돌아본다. 천국에서는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베아트리체를 만나고 베아트리체가 천국을 안내한다. 실은 베르길리우스는 베아트리체의 간청으로 안내자가 됐다. 단테는 아버지처럼 존경하는 시인과 또 사랑하는 여인의 ‘호위’를 받으며 지옥과 연옥, 천국을 7일 동안 여행한다.
인간이 죄를 짓게 되는 원인은 개인에게 부여된 자유의지를 잘못 사용하는 데 있다고 한다. 단테는 자유의지와 관련해 흥미로운 주장을 펼친다. 연옥 편에서 단테는 인간이 죄를 저지르도록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사랑’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의 사랑은 언제나 오류가 없으나, / 영혼의 사랑은 그릇된 대상 때문에, / 또는 너무 넘치거나 모자라서 잘못될 수 있다.”
자연의 사랑에는 실수나 오류가 없으나 인간의 사랑은 잘못될 수 있고 그래서 인간은 죄를 짓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도, 연인에 대한 사랑도 지나치면 ‘집착’이 되듯이.
‘신곡’에는 단테의 인간적인 삶과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혼란한 정치 싸움의 와중에 부당하게 고향에서 쫓겨났다는 생각은 단테의 뇌리 속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신곡’을 가리켜 욕망의 대리 충족을 표현한 작품이라 평하기도 한다.
‘신곡’에서 단테의 원한을 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다. 단테는 그를 자신을 쫓아낸 장본인으로 생각했다. 그에 대한 단테의 독설은 ‘신곡’ 전반에 걸쳐 기회 있을 때마다 반복된다.
보니파키우스 8세는 1303년 사망해 단테의 저승 여행 중에는 살아 있었다. 그런데도 단테는 지옥의 제8원에 그의 자리까지 미리 마련해두고 있다. 그곳은 성직이나 성물을 팔아먹은 고성죄(沽聖罪)의 죄인들이 구덩이 속에 거꾸로 처박힌 채 발바닥에 불의 세례를 받는 곳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니파키우스 8세가 고성죄를 지었다는 증거는 없다. 오히려 그는 가톨릭 역사에서 교황권을 확립하기 위해 노력한 인물로 평가된다. 따라서 이 내용은 단테의 개인적 원한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단테는 이탈리아와 피렌체, 가톨릭교회의 모든 부패와 타락이 보니파키우스 8세(재위 기간 1294~1303년)의 잘못에서 비롯됐다고 봤다.
반대로 단테에게 호의를 베푼 사람들은 연옥이나 천국에 배치된다. 또 책에는 이들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애정이 흐르는 글로 넘쳐난다.
대표적으로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가 지옥 편 5곡에 소개돼 있다. 단테는 지옥에서 애욕의 죄인들이 있는 곳을 지나다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영혼을 발견한다. 두 사람은 휘몰아치는 폭풍의 형벌 속에서도 마치 “바람결에 가볍게 걸어가듯 함께” 가고 있다. 단테는 이들 영혼이 이야기하는 동안 우는 모습이 너무 애처로워 “나는 죽은 듯 넋을 잃고 / 죽은 몸이 넘어지듯이 쓰러졌다”고 한다.
프란체스카는 유랑 중의 단테를 환영했던 라벤나의 귀족 귀도 폴렌타의 딸이다. 그녀는 1275년 리미니의 성주 잔치오토 말라테스타와 정략결혼을 하게 된다. 불구의 몸이었던 잔치오토는 결혼식장에 동생 파올로를 대신 내보낸다. 신부 프란체스카는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파올로를 사랑하게 되고 이후 두 사람은 잔치오토에게 발각돼 함께 죽음을 당한다.
저승 여행 이야기를 통해 단테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삶의 의미를 되짚어 보게 한다. 결국 ‘신곡’의 저승은 바로 삶의 현실을 비춰주는 거울이다. 그렇게 ‘신곡’은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제시하기보다는 구원의 길에 동참하기를 권한다.
‘신곡’은 선과 악, 죄와 벌, 정치와 종교, 문학과 철학, 신화와 현실, 인간사의 모든 주제를 끌어안은, 인간의 상상력이 빚어낸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프랑스 화가 구스타브 도레가 ‘신곡’의 장면들을 삽화로 그렸고, 영국의 신비주의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는 ‘신곡’에 심취해 102점의 그림을 남겼다.
중세는 단테의 ‘신곡’을 거쳐 근대로 향한 발걸음을 내딛는다. 따라서 ‘신곡’은 유럽 근대문학의 효시로 간주된다. T.S. 엘리엇은 “서양의 근대는 단테와 셰익스피어에 의해 양분된다”고 했다. 단테가 쓴 ‘제정론’은 중세를 뒤흔드는 ‘정교분리’를 담고 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의 주인공은 호주머니 속에 단테의 ‘신곡’ 문고판을 넣고 다니면서 틈나는 대로 아무 데나 펼쳐 읽는다. ‘신곡’은 그의 삶의, 여행의 동반자였던 것이다. ‘신곡’은 지금도 누구에게나 삶의 거울이 돼주고 있다.
[최효찬 자녀경영연구소장·비교문학 박사 / 일러스트 : 정윤정]
지옥은 거의 모든 종교에 존재하는 고통과 징벌의 상징이다. 지옥하면 흔히 땅속에 위치한 처절하고 암울한 사후세계를 연상한다. 사실 ‘지옥(地獄)’이라는 한자 역시 ‘지하 감옥’이라는 의미니, 이는 어쩌면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흥미롭게도 지옥이 땅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기원 전후다. 그 이전 시기 지옥은 세계의 끝인 변방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이 세계의 중앙에는 신들의 세계인 신령한 우주산(宇宙山)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중심으로부터 멀어질수록 하열한 세계가 펼쳐진다고 생각했다.
이는 문명과 야만의 대비로 이해될 수 있는 중심과 변방에 대한 차별이다. 이러한 중심과 변방의 극단적인 분기가 바로 ‘신들의 세계’와 ‘어둠의 지옥’이다. 이렇게 놓고 본다면, 왜 지옥이 세계의 바깥에 존재하는지를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희랍신화에서 헤라클레스는 사후세계인 하데스의 세계로 간다. 그곳에서 저승의 입구를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개 케르베로스를 잡아 스틱스의 강을 건너 이 세계로 넘어온다. 이는 이 세계와 사후가 수평선상에 존재하는 연결된 공간임을 알게 한다. 지옥 역시 사후세계에 속하는 곳이니, 이 또한 땅속에 있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기원 전후가 되면 대상(隊商)무역의 발달로, 수평 세계 속에 더는 사후세계나 신들이 존재할 곳이 없게 된다. 미지의 영역이 축소되면서 인간의 사고가 변모한 까닭이다. 이로 인해 ‘하늘 위의 신’과 ‘땅속의 지옥’이라는 인식이 새롭게 대두한다. 수평에서 수직으로 세계관이 바뀌는 것이다.
불교는 기독교 같은 유신론적 종교와 달리 사후세계에 심판자가 없다. 유신론 종교에서 천상과 지옥을 나누는 기준은 신에 대한 믿음이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에 대한 믿음에 따라, 천국은 신의 선물이며 지옥은 징벌의 공간이 된다. 그런데 예수의 연대가 늦기 때문에, 이전 시대 인물인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등은 예수를 믿을 기회조차 없이 곧장 지옥행이 결정된다. 이러한 모순에 대한 깊은 고민이 바로 단테의 '신곡(1321)' 속 연옥이다.
심판자가 없다면, 불교에서는 천상과 지옥이 어떻게 나뉘는 것일까? 여기에 적용되는 원리가 바로 ‘유유상종’이다. 수증기가 모여 구름이 되고 오물이 모여 하수가 되듯, 동류가 상응해 하나의 집단과 세계를 구성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긍정적으로 뭉치면 천상이 되고 부정적으로 모이면 지옥이 된다. 이는 마치 이 세계에 상류층과 감옥이 존재하는 것과 유사하다. 즉 상류층과 감옥이 하나의 독립된 거대한 세계를 구성하는 것, 이것이 바로 불교의 천상과 지옥이다.
감옥은 원해서 가는 곳은 아니지만, 자신이 선택한 잘못된 행위의 결과로 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지옥은 스스로의 선택이라는 판단도 가능하다. 이렇게 모인 이들끼리 서로가 고통을 주고 고통을 받는 세계, 이곳이 불교에서 말하는 지옥이다. 이런 점에서 불교의 지옥은 굳이 땅속에 있을 필요가 없다. 즉 땅속의 지옥이란, 불교적으로는 다분히 상징성인 것이다.
천상의 세계 역시 지옥의 구성방식과 같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상류층과 같은 천상에는 지능적인 악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 세계의 상류층 역시 모두가 선은 아니다. 상류층에는 때로 기득권의 세습 집단도 있고, 또 교묘하면서 지능적인 악도 존재한다. 불교의 천상에는 이런 세 종류의 세계가 모두 있다. 선한 존재들이 모인 곳, 무능한 기득권자들의 세계, 그리고 지능적인 악이 층위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가장 주목되는 것은 지능적인 악인데, 이를 천마(天魔) 즉 마신이라고 한다. 이들은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가 전 세계에 피해를 주고 자신들은 빠져나간 것처럼, 고도로 지적인 동시에 위험하다. 이들이 지옥에 가지 않는 것은 대형 로펌이 부당한 권력과 부도덕한 자본을 변호하면서도, 더욱더 상류층으로 올라가는 것과 유사하다. 즉 천마는 지옥을 넘어서 있는 부도덕한 존재들인 셈이다. 이와 같은 구조도 가능한 것이 불교의 천상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불교의 천상과 지옥은 이 세계의 구성방식을 상당 부분 모사하고 있다고 하겠다.
자현 스님ㆍ중앙승가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