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푸르스트....

tlsdkssk 2020. 1. 4. 13:08











마르셀 프루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작품으로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총 7편, 4천 쪽이 넘는 이 방대한 연작소설은 소설의 양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면서 세계 문학의 흐름까지 변화시켰으며, 프루스트에게 '현대소설의 창시자'라는 칭호를 안겨 주었다.

발랑틴 루이 조르주 외젠 마르셀 프루스트는 1871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의 오퇴유(오늘날 라 퐁텐 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는 저명한 내과 의사로, 콜레라 연구로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은 인물이었고, 어머니 잔느 클레망스는 부유한 유대인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15세의 프루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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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루스트는 예민하고 유약한 상류층 소설가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만년에도 검고 숱이 많은 머리, 크고 검은 눈동자와 가냘픈 몸매,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재된 모습, 병약한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런 이미지처럼 프루스트는 전형적인 파리 상류 가정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에는 사교계의 총아로 지냈으며, 육체적 질병과 정신적인 혼란스러움을 지닌 인물이었다. 선천성 천식 때문에 어린 시절 대부분을 침대에서 보냈고, 천식 외에도 신경증적 증상과 소화 장애 등으로 성마르고 예민했다. 태양빛, 거리의 소음, 향수 냄새조차 참지 못할 정도여서 바깥출입도 거의 하지 않았을 정도라고 한다. 때문에 장남이었지만 가족들에게 큰 기대를 받지 못했고, 아버지의 뒤도 동생 리베르가 잇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헌신적인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했으며, 성인이 되어서는 한가로이 살면서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유년 시절에 거의 누워만 지내면서 독서와 편지 쓰기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던 프루스트는 11세 때 파리 콩도르세 중등학교에 입학했다. 감수성이 풍부하고 지적 능력이 탁월했던 예민한 소년은 학우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자신의 동성애적 성향까지 깨달으면서 힘겨운 10대를 보냈다. 17세 때는 문학적 재능을 가진 친구들과 함께 교내 잡지 〈르뷔 릴라〉를 창간하고, 사교계 생활을 시작하면서 문학 살롱에 드나들고 문학 습작을 했다. 이듬해 대학 입학자격고사을 통과했고, 군대에 자원해 약 1년간 오를레앙에서 군 복무를 했다.

제대 후 파리로 돌아온 그는 파리 대학에서 법학과 정치학을 공부했다. 군 복무 기간에도 휴가 때마다 파리에 와서 살롱을 드나들었고, 대학 시절에도 사교계 활동에 몰두해 작가, 화가, 음악가, 귀족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그런 한편으로 비평이나 단편소설을 꾸준히 발표했고, 법학사 시험과 문학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그럼에도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아마추어 작가나 예술 애호가, 즉 자신의 기준에서 한량이 될까 봐 걱정했다. 프루스트는 아버지의 성화에 못 이겨 대학 졸업 후 마자랭 도서관에 사서로 취직했다. 그러나 근무한 지 6개월 만에 신경쇠약을 이유로 1년짜리 휴가를 얻어 몇 차례 연장하던 끝에 그마저도 귀찮아지자 그만두었다.

1896년, 아나톨 프랑스의 서문과 마들렌 르메르의 삽화, 레이날도 앙의 악보를 곁들여 첫 단편집 《즐거움과 나날》을 자비 출판했지만, 잘 팔리지 않았고, 비평가들에게도 그리 큰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이후 드문드문 예술 평론을 잡지에 발표하던 그는 영국의 예술 평론가 존 러스킨의 저작들을 읽고 심취하여 1900년부터 6년간 그의 작품들을 번역하는 데 몰두한다.

1903년에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프루스트는 많은 유산을 물려받았다. 1905년에는 사랑하는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는데, 프루스트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그때까지 미뤄 두었던 소설 쓰기에 대해 본격적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한다. 부모님이 남겨 준 유산이 많아 경제적으로도 풍족해서 그때까지의 생활수준을 유지하면서 전업 작가 생활을 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슬픔 때문인지 목숨이 위협받을 정도로 천식이 심해졌다. 결국 프루스트는 어머니가 죽은 지 석 달 만에 파리를 떠나 요양원에 입원했다.

1910년, 39세부터 프루스트는 집에 틀어박혀 소설 쓰기에 몰두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사교계 생활을 포기했고, 몇몇 친한 친구 외에는 집에 들이지도 않았다. 소음과 냄새를 참기 힘들어 해 방의 벽에 코르크를 대고 지냈으며, 이따금 발레 공연이나 휴양을 떠나는 것 외에는 거의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유년 시절의 기억, 사교계 생활과 인물들, 내면의 갈등, 사랑의 경험 등을 재구성하여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총 7편의 연작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1912년 그는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완성하고 여러 출판업자들에게 보냈으나 장황하고 무미건조하며, 지루하다는 등의 답을 받았다. 거기에다 이 작품은 한 권으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총 7편 중 1편에 불과했다. 프루스트는 결국 출판업자를 찾지 못하고 1913년 11월 원고를 자비로 출판했다. 심지어 대문호 앙드레 지드조차 이 작품을 읽어 보고 출판을 거절했는데, 이후 이 일을 '자신의 생애에서 저지른 가장 큰 실수, 가장 큰 후회스러운 일 중 하나'로 꼽았다.

이 작품은 출판 직후에는 아무런 주목도 받지 않았으나 제2편 《꽃피는 아가씨들 그늘에》가 1919년 공쿠르상을 타면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다. 세계대전 동안에도 그는 계속 소설을 쓰고 완성된 소설의 퇴고를 반복하며 지냈다. 2편의 출판이 늦어진 것은 세계대전 때문에 1914년경부터 출판사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이었다. 이후부터는 지드의 배려로 작품이 계속 간행될 수 있었다. 제3편 《게르망트 쪽》과 제4편 《소돔과 고모라》는 그의 생전에 출간되었고, 제5편 《갇힌 여인》, 제6편 《사라진 알베르틴》, 제7편 《되찾은 시간》은 그의 사후인 1927년까지 이어서 출간되었다.

17, 18세기 소설들이 사회의 거대한 흐름과 그 안에서 요동치는 인간의 운명 등을 그려 낸 데 반해, 프루스트는 오직 인간 내면의 모습, 그중에서도 인간의 '의식의 흐름' 그 자체에 집중했다. 때문에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작품이 출간되었을 때 '소설이 아니라 그저 여러 단편적인 인상을 모아 놓은 글'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두서없는 문체, 감정의 흐름과 명상적인 분위기, 일관되지 않은 흐름, 그때그때 좇은 감각의 묘사 등 이 작품은 소설이라기보다 인간 정신의 탐구라고 부를 만하다. 때문에 이 작품은 질적, 양적 측면에서 독자들에게 가장 읽기 힘든 작품 중 하나로도 꼽힌다.

그러나 이 작품을 온전히 읽거나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오늘날 우리들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 발상, 즉 기억이 감각 경험, 오늘날 비자발적 기억이라 불리는 것에 의해 촉발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비자발적 기억이라는 관념은 이후 20세기 문학을 지배했을 뿐만 아니라 심리학에서도 중요한 개념으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작품이 두서없어 보이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요소들이 프루스트를 '현대소설의 창시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이 작품 이후에 무엇을 더 쓸 수 있겠는가? 프루스트는 영원히 사라져 가는 것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했다."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평은 이 작품이 지닌 가치를 대변하고 있다.

프루스트는 단편집 《즐거움과 나날》, 장편소설 《장 상퇴유》(1952년 출간), 논픽션 《러스킨 읽기》, 《생트 뵈브에 대한 반론》(1954년 출간) 등을 썼으나, 그의 작품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거의 유일하다고 여겨진다. 그전의 단편소설들과 장편소설 역시 이 작품을 위한 준비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요약 1913년에서 1927년에 걸쳐 간행된 작품으로, 과거는 풍화되어 잊히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 기억으로 남아 있다가 초시간적 감각을 계기로 되살아난다는(‘잃어버린 시간’의 발견)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융합되어 가는 서로 다른 2개의 세계

작은 마들렌 과자가 화자인 ‘나’각주1) 의 소년 시절을 환기시키는 것으로 이 소설은 시작된다. 소년이 매년 휴가를 보내러 간 시골 마을 콩브레에는 2개의 산책길이 있다. 하나는 파리의 부르주아인 스완가(家)의 별장으로 향하는 길로, 그 곳에는 스완 집안의 딸 질베르트가 살고 있다.

또 하나의 길은 중세 때부터 내려온 명문 게르망트 공작부인의 저택으로 향하는 길이다. 이 두 갈래 길은 소년인 ‘나’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 두 가지 동경의 방향을 상징하게 되는데, 소설은 이 2개의 세계가 세기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 직후까지의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 서로 교차하며 융합해 가는 형태로 전개된다.

‘나’는 파리에서 다시 만난 질베르트와의 아련한 첫사랑이 깨진 뒤 할머니와 노르망디 해변의 발베크로 가고, 그곳 해변에서 알게 된 소녀 알베르틴에게 끌린다. 사교계 사람들이 모이는 이 피서지에서 ‘나’는 또한 게르망트 가문의 생 루와 샤를뤼 등의 친구를 얻는다. 그 뒤 파리로 돌아간 ‘나’는 그들의 지도를 받으며 동경하던 생제르맹가(家)의 귀족 사회에 조금씩 편입되어 가고, 샤를뤼를 중심으로 한 기괴한 소돔의 거리도 엿본다.

한편 ‘나’는 발베크에서 만난 이후 알베르틴과의 교제가 깊어 감에 따라 그녀가 고모라의 여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깊어져서 질투심에 사로잡힌 나머지 그녀를 자기 집에 가두어 놓고 진상을 알려고 하지만, 결국 알베르틴의 가출과 죽음으로 지옥과 같은 동거 생활을 끝내게 된다.

인생에 대한 꿈도, 작가가 되겠다는 희망도 잃은 채 막막한 기분으로 두 번째 요양지에서 파리로 돌아온 ‘나’는 초대를 받아 게르망트 대공의 저택으로 가는 도중에 저택 안뜰의 울퉁불퉁한 자갈에 발이 걸린다.

그러자 갑자기 말할 수 없는 행복감과 함께 산마르코 사원의 세례당에 있던 울퉁불퉁한 자갈과 베네치아의 도시가 떠오른다. 그것은 마들렌 과자의 체험과 같이 무의식적 기억이 나타난 것으로, ‘나’는 이런 과거와 현재에 공통되는 초(超)시간적 감각이야말로 존재의 본질을 나타내고, 이 기적만이 ‘잃어버린 시간’을 발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살롱에서 만난 옛 지인들은 모두 놀라울 정도로 나이가 들었다. 죽은 생 루와 질베르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 눈앞에 나타났을 때 ‘나’는 이 소녀 속에 자신이 소년 시절에 동경했던 2개의 ‘방향’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본다. 이렇게 해서 ‘나’는 ‘시간’의 파괴를 초월해 영원히 무너지지 않는 세계의 존재를 알게 되고, 드디어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한다.

뛰어난 지성과 예민한 감수성을 지닌 ‘나’

발자크나 스탕달의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는 이 작품을 펼치면 매우 놀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작품에는 『환멸』의 보트랭이나 『파름의 수도원』의 파브리스처럼 정열적인 행동으로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는 인물이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다. 물론 게르망트 공작부인이나 샤를뤼 등과 같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기는 존재도 있지만, 그들의 경우도 인상파의 그림처럼 다양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조금씩 점이 찍히듯 나타나서 차츰 복잡한 전체상을 드러내는 식으로 존재한다.

주인공 ‘나’ 역시 작품 속에서 살아 움직이기보다는 관찰하는 것을 주된 일로 삼고 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마음에 비친 자연 세계의 관능적인 아름다움이나 사교계의 미세하고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정교한 렌즈처럼 찍어 내기도 하고, 자신의 내면으로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감정과 감각의 기복을 가만히 맛보는 것을 주요 임무로 하는 일종의 허점(虛點), 말 그대로 정확한 의미에서의 반(反)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다.

곧, 이 소설의 특징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을 그대로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이라는 관찰 기계를 통해 체험된,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각이나 심리를 매우 호흡이 길고 환기적(喚起的)인 문체를 사용해 표면으로 끌어내는 데 있다.

작품 속의 명문장

“작품이란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일종의 광학 기계라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으면 아마도 볼 수가 없었을 자기 속의 무언가를 보게 해 주는 기계인 것이다.” - 마지막 편 『되찾은 시간』

작품이란 현실의 정직한 거울이 아니라 만화경처럼 생을 확산시키거나 망원경처럼 멀리 있는 한 점을 확대하기도 하면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주는 것이라는 생각은 은유 이론과 더불어 현대 문학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이스와 함께 프루스트가 현대 문학의 시조라고 불리는 이유에는 언어의 이 마술적인 기능에 주목한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프랑스의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 1871~1922)는 1871년 파리 근교의 오퇴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아드리앵 프루스트는 나중에 파리대학교 의학부 교수가 되었고, 외가인 베이유 가문은 부유한 유대계 부르주아였다. 태어날 때부터 병약해 9세 때 신경성 천식 발작을 일으킨 이후로 평생 이 고질병을 앓았다.

콩도르세 고등중학교를 나와 파리대학교 법학부로 진학했는데, 그 사이에 벌써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 동인 잡지나 상징파 문예지 등에 시와 수필, 단편소설 등을 발표하기도 하고(그 대부분은 아나톨 프랑스가 서문을 붙인 『즐거움과 나날』에 수록됨), 여러 사교계 모임이나 문학 살롱에 출입하기도 했다.

1895년 3인칭으로 된 자전소설인 『장 상퇴유』(1952)의 집필에 착수해 수년에 걸쳐 단속적으로 집필하다 1899년에 폐기했다. 그 뒤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착수할 때까지 수년 동안 존 러스킨의 연구와 번역(1904년의 『아미앵의 성서』, 1906년의 『참깨와 백합』), 프랑스 작가들의 모작에 의한 문체 비평(1919년의 『모작과 작문집』에 수록)이나 소설 형식의 평론(『생트 뵈브에 대한 반론』)을 시도하면서 나중에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수록할 만한 주제를 모색했다.

1903년에 아버지가, 1905년에 어머니가 잇달아 세상을 떠났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를 잃은 그는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1909년 가을에 드디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착수해 1911년에 제1편 『스완네 집 쪽으로』를 집필했는데, 출판사를 찾기 힘들어서 하는 수 없이 1913년에 그라세사에서 자비로 출판했다.각주1) 제2편 『꽃핀 소녀들의 그늘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 때문에 1919년에 『누벨 르뷔 프랑세즈』(NRF ; 신프랑스평론)각주2) 에서 출판되어 공쿠르상을 받았다.

그 이후 프루스트는 다가오는 죽음과 숨막히는 경쟁을 하면서 작품의 완성을 서둘렀지만, 1922년 11월 제5편 『갇힌 여인』을 추고하다가 중반에 폐렴으로 사망했다. 후반에 해당하는 3분의 1은 초고 상태로 남겨져 사후에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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