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2003법정스님 법문

tlsdkssk 2018. 10. 29. 14:48

작성 날짜: 2003/10/07.

(지난 9월 28일 길상사에서 있었던 법정스님의 법문을 옮겼음.많이 느끼시기 바랍니다.)-------


아침저녁 많이 설렁해졌지요?
더위도 한때입니다. 더위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한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고 견디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그러한 일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한때라고 이렇게 생각하면 극복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모두 한때입니다. 늘 지속되는 일은 없습니다.

엊그제 미국 동북부도시에서 정전사태가 일어났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계에서 으뜸인 도시에서 정전사태가 일어난 것입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정지이었지요. 지하철도 움직이지 않고 호텔 밖에 나갔다가 자기 방에도 들어갈 수도 없었대요. 요즘은 기계가 전자식으로 되어있기 때문이지요. 온 도시가 마비됩니다. 현대문명의 허점이지요. 몇 년 전에 정전이 있었을 적에는 폭동이나 약탈과 방화가 있었지요. 다행히 이번에는 폭동은 없었지만 몇 건의 약탈은 있었대요.

우리가 무엇인가 의존하게되면 그에 따른 반대급부도 함께 지불해야 됩니다. 편리한 문명의 이기이지만 늘 지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고장이 나서 그 앞에서 우리가 옴짝 못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전력체계가 미국보다 앞서있데요. 그래서 지역적으로 정전이 되더라도 금시 복구가 된답니다. 미국은 그런 체계가 안되었나 봐요. 미국이 무엇이든지 앞선 것은 아닙니다.

제가 사는 곳에는 그럴 위험이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아예 전기라고는 의존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50, 60년대에는 그렇게 살았지요. 일단 편리한 문명의 이기에 의존하다보니까 그것이 탐이 나면 옴짝달싹 못하잖아요. 전기, 전화, 수도, 가스 이것만 끊어져보세요 옴짝 못합니다. 우리들의 삶이 이렇게 허약한 토대에 서 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더위 때문에 약 3천명이 죽었다면서요. 그쪽은 여름에 시원해요. 습기가 없고 그래서 아예 냉방시설 같은 것이 없습니다. 차도, 유럽에서 만든 차량은 에어콘시설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40°C 가까운 더위가 오니깐 노약자들이 그렇게 돌아가시게 됩니다. 이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이런 미국식 생활방식, 대량생산 대량소비체계, 즉 미국식 생활방식에 대한 변화가 오지 않는 한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두고두고 되풀이 될 것입니다.
지구온난화란 무엇입니까. 대량소비를 하다보니깐 지구가 더워져서 자꾸 해수면이 올라오고 그러다 보니 생태계이변이 생겨 더위나 추위, 홍수나 가뭄이 예측할 수 없이 산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잇지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몰려가는 것입니다. 생태학자나 환경학자들이 그런 것을 예보했지만 생활을 개선하지 않았기 때문에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경찰청통계에 의하면 작년 한 해 우리 나라에서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분이 8천명이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살자는 1만 3천 55명입니다. 스스로 자살한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 하루에 평균 35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돌아가고 있습니다. OECD국가 중에서 우리 나라가 자살율에서는 다섯 번째입니다. 동구권이 우리보다 앞서 있답니다.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한 40%된다고 하네요. 열 사람 중에 네 사람이 경제적 이유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지요. 카드빚, 신용불량자이기 때문에, 카드 이것 문제지요. 카드빚 갚기 위해 살인도 하고 도둑질도 하잖아요. 요즘 자살자들이 부쩍 늘어나고 있어요.

오늘 자살과 함께 죽음에 대해서 ,기분 나쁘겠지만,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자기 차례가 오면 죽습니다. 영원히 사는 존재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든 살아있는 존재는 언젠가는 죽게됩니다. 영원히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것은 우주질서이고 자연현상입니다. 만약 우리가 죽지 않고 100년이고 200년이고 산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식물은 오래 살수록 늠름한 그런 기품을 지닙니다. 사람이나 동물은 한동안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누구를 막론하고 추해집니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살에 대한 충동을 느껴본 사람은 많을 거예요. 순간적으로 홧김에 나머지 허락한 세월을 반납하고 뛰어내리고 싶은 사람이 많을 거예요. 지나간 과거를 생각해보면 아찔해요.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가 살아왔습니다. 죽는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일시적으로 고통에서, 번민에서 벗어났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살이란 새로운 업을 짓게 됩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해치는 또 하나의 업을 짓게 됩니다. 고통과 갈등이 잠시 중단될 뿐 자살이란 또 하나의 업을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이 몸은 얼마든지 죽일 수 있고 죽기? ?합니다. 하지만 영혼은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습니다. 이 몸은 스스로 죽건 자연사되건 몇 번씩 죽거나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영혼은 무엇으로도 죽일 수 없습니다. 영혼은 항상 또 다른 것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이 몸을 버린다고 영혼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또 다른 몸 안에 존재하게 됩니다. 옛 어른들도 가르친바 있듯이 우리가 죽게되면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합니다. 오로지 업만 새 몸을 따를 뿐입니다. {만반장글곡}(유신스님의 법문). 즉 우리가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고 오로지 새 몸만 따른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순간적인 충동일 수 있겠지만 일상생활에서, 아이쿠 못살겠어 죽겠네 죽겠네, 하게되면 결국 죽게 되요. 그것이 업이 되니깐. 그런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당사자 한 사람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과 친지와 이웃에게 크다란 상처를 남깁니다. 자기 혼자만 간단히 빠져나간다면 해결될텐데 무고한 가족과 친지와 이웃들에게 말할 수 없는 크다란 상처를 입히게 됩니다. 더구나 무고한 어린이들과 함께 죽는 동반자살은 이것은 살인행위입니다. 어린이는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그 부모를 의지해서, 인연에 의해, 이 세상에 나왔을 뿐이지 그 부모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다세(多世)에 익힌 그 인연이 있어 업에 의해서 그 부모를 의지해서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 집의 손님이에요. 손님을 어찌 죽입니까. 흔히 부모가 죽고 나면 이 아이가 어떻게 하느냐 하고 동반자살을 한다고 하는데, 말이 안됩니다. 각자 자기 업이 다르기 때문에, 그릇이 다르기 때문에 박복한 부모를 벗어나면 그 아이는 제대로 피어날 수 있습니다. 동반자살은 살인행위입니다.

모든 생물은 살만큼 살면 다 죽습니다.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입니다. 영원히 사는 생물은 없습니다. 자기 차례가 오면 다 홀로 떠납니다. 이 일만은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습니다. 이 시간에도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병원에서 온갖 병고를 치르고 있을 것입니다. 단 며칠만이라도 살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면서 투병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순간의 생명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이 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한 편에서는 어떤 이유에서 간에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자살이 아닌 자연사는, 제대로 살다가 죽는 일은 생명의 순환이며 질서이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듯이 생애도 순간이 있습니다. 살만큼 살면 자기에게 주어진 명이 다하고 자기 차례가 되면 떠나게 되요. 그런데 우리가 명심할 것은 이와 같은 죽음은 목숨의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이에요.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옮겨가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엄숙한 일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엄숙한 사실이에요. 죽음은 삶의 절정이자 마지막으로 피는 아름다운 꽃일 수 있습니다. 한 생애를 죽음을 통해서 마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삶에서 죽음으로 가는 끝없는 순례의 길입니다. 엄마배속에서 태어났을 때를 기점으로 한다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생명의 전개일 것 같지만 죽음 쪽에서 보면 하루하루 죽어오는 것이지요. 하루하루 살아버리는 것이지요. 따라서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흔연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종말이 아니라 옮겨가는 일이기 때문에 이 몸 가지고는 지치고 지쳤기 때문에 새 몸을 받기 위해서 갈아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이 굳게 믿어져야 합니다. 그렇기에 죽음 앞에 두렵지 않습니다. 나에게 허락된 하루하루 시간을 어떻게 소모하고 있느냐, 과연 내 자신답게 살고 있느냐 이것이 문제이지 죽음이 문제일 수 없습니다.
과일 속에는 씨앗이 들어있습니다. 수박이 됐건 참외가 됐건, 우리 삶 속에는 죽음이 씨앗처럼 들어있습니다. 생과 사는 낮과 밤과 같습니다. 낮이 다하면 밤이 옵니다. 또 밤이 다하면 새 날이 옵니다. 우리가 죽고 사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한 생애의 막을 내리는 삶의 절정을 말하는 죽음을 아무렇게나 내맡겨서는 안돼요. 이 다음 생애로 가는 길목이기 때문에 엄숙하고 고요하고 평화로워야합니다. 따라서 평소 낯익은 환경에서 가족과 친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마음놓고 편히 죽을 수 있어야해요. 이것은 곁에서 도와야합니다. 혼자서 그렇게 하기 어렵기 때문에 가족과 친지들이 도와주어야 합니다. 살만큼 살다가 돌아가실 분들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길 떠날 때 바래다주지 않아요. 배웅하지요. 잘 가라고 편히 가시라고 그렇듯이 죽음 앞에서 담담하게, 자연의 질서, 자연의 순화이니까, 아주 고요하게 평화로운 마음으로, 이 정거장에서 저 정거장으로 옮겨가도록 바래주어야 합니다. 이런 것이 살아있는 이웃들의 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는 어떻습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죽음을 낯선 병원에서 맞아요. 편리하다고 그러니까, 이것은 생각해볼 문제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음을 병원에서 치르고 있습니다. 어려운 살림인데도 비싼 병원비를 들여가지고 병원으로 가요. 병원이란 어떤 곳입니까. 냉혹한 곳입니다. 병을 낫게도 하지만 병을 새로 얻게도 만들어요. 또 병원이란 메카니즘, 그 거대한 구조를 움직이려면 막대한 재물이 필요합니다. 위독해지면 의사나 간호원이 들어와서 가족들은 다 내몰아버리고 차디찬 기계로서 연명을 시도하지 않습니까. 산소호홉기를 대고 혈관에 주사바늘을 꽂고, 살만큼 살다가 가시는 분을 편히 돌아가시도록 도와야하는데 어떻게든 연명을 시키려고 해요. 이런 것이 맹점이에요. 심장박동기를 댄다든가 산소호홉기를 들이댄다든가 주사바늘을 꽂아 연명시키려는 것이 현대의학의 맹점이지요. 절에서도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노스님들이 돌아가실 때, 살만큼 살다가 가는데, 극성스런 상좌들이 이병원 저 한의원으로 끌고 다니고 있어요. 이런 것은 모시고 다니는 일이 아니고 끌고 다니는 것이지요. 갈 때가 되어서 가야지 이곳저곳을 끌고 다닌다고, 그래서 지쳐서 더 빨리 죽어요. 이것은 효가 아닙니다. 한평생 살아오느라고 너무 지치고 고단해서 깊이 잠들어서 푹 쉬고 싶어요. 그런데 자지 못하게 자꾸 흔들어서 깨우면 이게 무슨 효에요? 우리가 그런 경험하지 않아요. 고단해서 자려고 하는데 밖에 누가 왔다고 자꾸 깨우거나 전화 왔다고 부르면 얼마나 짜증스러워요. 죽음도 마찬가지에요. 살만큼 살다가 이 몸 훌훌 벗어버리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가려고 하는데 부르고 흔들고 깨운다면 그것은 효가 아닙니다. 도리가 아닙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죽음은 삶의 종말이 아닙니다. 다른 삶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다 된 몸에서 새로운 몸으로 옮겨가는 것을 못하게 붙든단 말입니까. 물론 자식된 도리로서 최선을 다해서 한순간 더 살아 계시도록 하지만 이것은 감정적인 문제입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이왕에 돌아가실 것을 편안하게 돌아가시도록 거들어야하는 것입니다.

책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널리 읽혀온 '헨렌 니어링'이 자기 남편이 100살 살다가 돌아가신 후에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이 분(스코트 니어링)이 아주 훌륭한 분이에요. 어떤 선사보다 아주 깨끗한 임종을 맞이한 분입니다. 이 분이 자기가 그렇게 돌아갈 수 잇는 이유가 그의 아내가 그렇게 도왔기 때문에 그런 아름다운 죽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100살까지 살았어요. 사회학자고 미국사회에 영향을 끼친 분이에요. 늘 노동을 해서 집도 스스로 짓고, 이 분이 100살 되던 해 이제 모든 것이 쇠해지니까 단식으로 자기 몸을 벗고싶어해요. 단식에 의한 죽음은 자살과 다릅니다. 자살은 난폭한 자해행위이지만 스스로 살만큼 살아서 단식으로 자기 생을 마치겠다는 것은 자기가 선택한 일이고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아름다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은 아름다운 에너지의 고갈이고 평화롭게 떠나는 방법입니다. 그는 스스로 원해서 한 것입니다. 자살과 단식이 틀린 이유는 그것입니다.

살만큼 살다가 죽을 때 남에게 폐 끼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야겠다고 곡기를 끊고 쪼끔씩 쪼금씩 그렇게 세상을 하직하는 거예요. 이것은 일반동물들이 택하는 방법입니다. 동물들은 죽을 때가 되면 남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가서 스스로 먹이를 거부함으로서 조용히 생을 마칩니다. 집안에서 기르던 개들도 오래되면 밖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요. 어디 보신탕집에 잡혀간 것이 아니고 남의 눈에 띠지 않은 곳에서 가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짐승도 오래되면 영특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스코트 니어링'은 평소에 동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그곳에서 배웁니다. "나도 이 다음에 생을 마칠 때 단식을 통해서 생을 마치고 가야겠다'고 그는 노년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유언을 미리 남깁니다. 세 번 고쳤는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오면 나는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잘 들으세요. {나는 병원이 아니고 집에서 죽고 싶다. 어떤 의사도 곁에 없기를 바란다. 의학은 삶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으며 죽음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의사들 기분 나빠할는지 모르지만 이것은 현실이예요. 의사는 죽지 않아요? 의사가 있으면 주사에다 산소호홉기 등으로 귀찮게 굴테니깐 없기를 바란다는 것이지요. 사람이란 몸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정신도 영혼도 같이 있어요. 의사들이 다루는 것은 몸이에요. 고기덩어리에요. 그렇기에 영혼은 소홀히 합니다. 관심도 없고요.
{그럴 수 있다면 나는 죽음이 가까워 왔을 때 지붕이 없는 툭 트인 곳에 있고 싶다. 그리고 나는 단식하다가 죽고 싶다. 나는 죽음의 과정을 면밀히 느낄 수 있다} 순간순간 자기가 죽어가는 것을 자기가 죽어 가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싶대요. {그러므로 어떤 진통제나 마취제도 필요없다. 나는 되도록 빠르고 조용히 가고 싶다} 백년동안 사신 분이 자기가 갈 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회한에 젖거나 슬픔에 잠길 필요는 없다. 나와 함께 한 사람들은 마음과 행동이 조용함과 평화로움을 갖추어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누기를 바란다.} 이것은 중요한 말입니다. 가족과 친지들이 슬퍼하거나 비탄하지 말고 이왕 죽는 길인데 죽음의 경험을 함께 나누어달라는 거예요. 그러면 이 다음에 다른 사람이 죽을 때에도 평화롭게 그렇게 죽을 수 있을 거예요. 왜냐하면 자연스런 현상, 나뭇잎이 돋았다가 또 꽃이 피었다가 열매를 맺었다가 가을 서릿바람에 물들었다가 겨울 바람에 낙엽이 져서 땅으로 돌아가듯이 자연스럽게 지켜봐 달라는 거예요. 경험을 나눠달라는 거예요. {어떤 장의사나 직업으로 시체를 다루는 사람이 이 일에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 내가 죽고 나면 되도록 빨리 친구들이 내 몸? ?작업복을 입혀서 평범한 나무상자에 뉘이기를 바란다} 이 사람이 평생 일을 해왔기 때문에 일했을 때 입던 옷, 그것이지 따로 삼베로 만든 옷 등 수의처럼 그런 것으로 입히지 말고 작업복으로 입히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체없이 화장터로 보내어 화장하기 바란다. 어떤 장례식도 열어서는 안 된다. 화장이 끝난 뒤 되도록 빨리 재를 거두어 바다가 바라보이는 나무아래 뿌려주기 바란다. 나는 맑은 의식으로 이런 모든 것을 요청하는 바이며 내 뒤에 살아가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존중되기를 바란다}

백살동안 아주 잘 살다가 간 분이예요. 그렇게 자기 끝을 마무리하고 싶다는 거예요. 자기 소원대로 자기 아내가 합니다. 마지막에 남긴 말이 {좋아}하고 가게 됩니다.
이 분이 돌아가셨다는 것을 온 세상 사람들이 알고 '스코트 니어링'이 백년동안 살았기 때문에 세상이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한 세상을 살았다가 아무개가 살아 있었기에 세상이 좋아졌다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

원효급건선사는 송나라 때 스님입니다. 11세기에서 12세기 때입니다. 이분의 어록이 많이 있었어 승가에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이분의 법문에 {생야전기현 사야전기현}

살 때는 삶에 철저하고
죽을 때는 죽음에 철저하라

살 때는 자기의 기량을 마음껏 발휘해서 살고 죽을 때는 미련 없이 선뜻 물러서라는 말입니다. 미련을 두고 애걸복걸하거나 무슨 주사바늘, 산소통 가져올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각오로 세상을 산다면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을 언잖게 생가지 마세요. 삶과 똑 같아요. 영원히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남의 일이 아닙니다. 각자의 일입니다. 언젠가 내 차례가 오면 자 죽지 않아요. 죽음을 끝이라고 생각하면 한스럽고 애통하지만 어떤 새로운 삶으로 옮겨가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그렇게 슬퍼할 것이 없습니다. 조용히 평화롭게 맑은 정신으로 가시도록 전송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살아있는 이웃의 도리입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살아갑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살아갑니다. 언제 어디서든 지금 이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바로 자기가 서 잇는 그 자리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 바짝 차려 가지고 자기가 지니고 있는 전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살만큼 살다가 자기 차례가 되어서 가게 되면 훨훨 벗어버리고 이쪽 정거장에서 저쪽 정거장으로 떠나듯이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은 평소에 생사관을 분명히 지녀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도중에 아무리 속상하거나 억울한 일이 있어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은 하지 않습니다. 자살은 해결이 아닙니다. 남에게 많은 상처를 주면서 자살이라는 또 하나의 업을 짓게됩니다. 업 때문에 이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어떤 상황에 부딪히면 되풀이하게 됩니다.
절에서도 가끔 스님들이 스스로 죽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 분들은 대중에게 폐 끼치지 않는다는 점만 생각하는 것이고, 제대로 발심수행을 못하면 스스로 그렇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있어 스스로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는 것은 몇 고비을 거쳐서 이 지점까지 도달해왔습니다. 남은 생애에도 어떠한 상황이 우리에게 닥쳐올지 모릅니다. 그때마다 생과 사가 무엇이라는 걸 투철히 인식한다면 도중에 하차하는 이웃에 막대한 상처를 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건 해결이 아니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짓는 일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