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스크랩] 이키루 Ikiru(1952) / 구로사와 아키라

tlsdkssk 2018. 8. 14. 15:45

살자 (이키루 Ikiru) 1952

dane.egloos.com/277869


제목 : 살자 (이키루 Ikiru)
감독 : 구로사와 아키라
제작년도 : 1952년
러닝타임 : 143분
흑백




시청 시민과 과장 와타나베씨. 몇 달 후면 25년 근속 기록을 세울 정도로 매일 꼬박꼬박 출근해서 자기 자리 보신하는 일 한가지는 철저했던 사람이다. 젊어서 아내가 죽은 후 평생 외아들 돌보다 좋은 시절 다보내고 이제 그가 하는 일이라곤 곧 다가올 정년 퇴직을 기다리며 아무 의미 없는 결재 도장이나 찍고 있을 뿐이다. 취미도 없고, 친구도 없고, 하루종일 결재 서류에 도장만 찍는 그의 별명은 '미이라'. 곧 살아있으되 죽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야유다.



연이어 계속된 위장 통증 때문에 어느날 와타나베씨는 참으로 오래간만에 자리를 비우고 병원에 가보게 된다. 괜찮겠지 하면서도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던 그는 문득 의사의 어두운 낯빛을 보고 자신이 위암에 걸렸음을 알게 된다. 앞으로 한 6개월이나 그의목숨이 남아 있을까?





와타나베씨는 극도의 공포와 외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의 일생을 희생하며 키워온 아들과 이야기를 해보려 해도 아들은 그의 퇴직금으로 새 집 지울 궁리에나 바쁠 뿐이다. 직장에는 와타나베의 후임이 누가 될까 수군대는 경멸스런 부하직원들의 눈총이기다리고 있을 뿐. 차라리 일찍 죽어버리는 게 나을 지 모른 다는 생각에 수면제를 한병 사보기도 했지만 정작 자살이란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죽음을 마주하게 된 와타나베를 괴롭히는 것은 지금까지의 자기 삶이 너무나 무의미했다는 사실이다. 이대로 죽어버리기엔 너무나 허무했다. 인생의 즐거움도 맛보지 못했고, 고난을 극복해가며 뭔가 뜻있는 일도 해 놓은 게 없다. 그의 인생은... 공허했다.

사놓고는 정작 먹을 엄두도 못낸 수면제를 벗삼아 와타나베는 선술집에서 혼자 술잔을 기울인다. 우연히 옆자리에 동석하게 된 사람은 3류 소설가. 외롭기 그지 없었던 와타나베는 소설가에게 자신의 사연을 털어놓고, 문득 자신에게 쾌락이 무엇인지 좀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인생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모르고 이대로 죽기는 너무나 억울하다며. 감동한 소설가는 쾌히 승락한다. "그럼 오늘 밤엔 내가 메피스토펠레스의 역할을 맡도록 하겠소. 마침 여기 검둥 강아지도 한마리 있군요." 그들의 앞길에 검은 개 한마리가 가로 질러간다.



소설가와 와타나베는 미친 듯이 환락의 거리를 쏘다닌다. 접대부에게 와타나베의 낡은 모자를 빼앗기기도 하고, 정신없이 여자의 품에서 춤을 추기도 한다. 그들의 여정 중 들린 한 술집, 환호성 속에 노래와 춤이 어울어진 흥겨운 분위기에서 그래도 말못할 괴로움을 어쩌지 못한 와타나베는 피아니스트에게 옛 노래 한곡을 부탁한다. 구슬픈 가락이 울려퍼지고, 사람들은 끼리끼리 블루스를추기 시작하는데, 갑자기 와타나베가 눈물을 글썽이며 노래를 따라 부르기 시작한다. 아가씨들이여 그대들의 입술이 시들기 전에 젊음을 즐기어라, 그대들의 청춘이 삭아들기 전에 사랑을 꽃피우라.



쾌락의 밤이 끝나도 와타나베는 아무런 위안도 찾지 못했다. 와타나베는 또다시 무언가를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이번에 와타나베가집착하게 되는 것은 같은 사무실에 근무하던 젊은 아가씨였다. 따분한 공무원 일을 집어 치우고 장난감 공장 공원으로 취직하고싶다는 젊고 활력 넘치는 이 아가씨는 와타나베를 즐겨 따른다. 싱싱하고 건강한 그녀의 모습에서 와타나베는 잠시나마 위안을 찾게된다. 그러나 그런 시간도 오래지 않아 자신을 계속 쫓아다니는 와타나베에게 아가씨는 금새 싫증을 내게 된다.

마지막 한번만 만나달라는 애원 끝에 어느 커피 샾에서 그녀와 마주한 와타나베. 그들이 마주 앉은 자리 맞은 편에는 한 떼의 남녀고등학생들이 누군가의 생일 파티 준비로 부산하다. 와타나베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 지금까지의 인생이 너무나 헛되이 느껴져괴롭다는 것, 지금이라도 뭔가를 하고 싶은데 그게 무엇일지 잘 모르겠다는 것을 고백한다. 생명력이 넘치는 젊은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노라고. 아가씨는 대답한다. "나는 그냥 열심히 장난감을 만들 뿐이에요.어린이들이 내가 만든 장난감을 가지고 행복할 것을 생각하죠." 그리고 그녀가 만든 예쁜 토끼 장난감을 와타나베에게 건넨다.무엇인가 깨달은 와타나베, "아직 끝나지 않았어.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인가 해낼 수 있을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소중히 토끼를 가슴에 품고 커피 샾을 나선다. 와타나베와 엇갈리며 맞은편 고등학생들이 기다리던 그날의 생일 파티 주인공이 등장하고, 계단을 내려서는와타나베의 등 뒤로 그들이 부르는 생일 축하노래가 울려퍼진다.



결국 그해 겨울, 와타나베는 사망한다. 와타나베의 죽음을 문상하러 온 그의 부하직원들은 죽음 몇달 전부터 그의 행동이 이상했던것은 떠올린다. 미이라 같던 와타나베가 어느날 갑자기 썩은 물이 고여 비위생적인 저수지를 어린이 놀이터로 개발하는 사업을 전력을 다해 추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갖은 어려움 끝에 와타나베는 사업을 완수하는 데 성공했지만, 결국 그 공은 시장이 독차지하게 되고 와타나베는 놀이터 개관식에서도 뒷전으로 처져야 했던 것. 놀이터가 완성된 다음날 아침와타나베의 시체가 놀이터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혹시 자살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와타나베의 부하 직원들은 자신들이 그동안 보았던 와타나베의 행적의 단편들을 짜맞추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들은 와타나베가 자신이 위암으로 곧 죽을 것을 알고 있었으며, 죽기 전에 무언가 보람있는 일을 해내기 위해 야쿠자들에게 생명을 위협받으면서도 일을 추진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추측해 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와타나베의 모습을 목격한 경관은 그가 행복하게 놀이터 그네에 앉아 옛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고 증언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죽을 거야. 그런데 왜 와타나베처럼 열심히 살지못하는 거지?" 감동한 그들은 앞으로는 와타나베의 본을 받아 시민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하자고 결의한다.

와타나베가 근무하던 사무실, 와타나베의 자리엔 이제 새로운 시민과장이 앉아 있다. 한 시민이 민원을 청하러 시민과에 찾아온다.그러나 전날 밤 결의했던 것과는 달리 새 시민과장의 반응은 심드렁 할 뿐이다. "다른 부서를 찾아가라고 해." 보다못한 한 젊은직원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 그러나 그를 쏘아보는 주위의 차가운 시선들을 이기지 못한 그는 다시 의자를 집어들고 제자리에앉아야 할 뿐이다. 그날 저녁, 그 젊은 직원은 와타나베가 만들어 놓은 놀이터에서 즐겁게 놀고 있는 어린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상념에 잠긴다.



'살자'는 괴테의 '파우스트'를 대본으로 하여 1950년대 일본을 무대로 바꾼 작품이다. 매우 느슨하게 원작을 재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여간 주의해 보지 않고서는 이 영화가 파우스트의 일본판이란 것을 깨닫기가 쉽지 않은데, 이를 위해 구로사와는 몇가지의 장치를 삽입하여 '살자'와 '파우스트'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 있다.  와타나베에게 환락의 도시를 소개하는 소설가가 스스로를 '메피스토펠레스' 역할이라고 칭하고, 그들이 만나 술잔을 기울이는 선술집에선 검둥개 (파우스트와 처음 만날때 메피스토펠레스는 검둥개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가 등장한다. 순결한 소녀 그레트헨은 시민과의 어린 여직원이 맡았다.  파우스트가 삶의 의미를 잃고 자살하기 직전 메피스토펠레스를 만나는 것처럼, 와타나베도 자살에 실패하고 소설가를 만나며, 이후 파우스트의 여정과 와타나베의 여정도 상당부분 유사하다. 그리고 만년의 파우스트가 죽기직전, 습지의 물을 빼서 농지로 개간하고 그 곳에 사는 모든 인간들이 행복해지는 백일몽을 꾸는 것 처럼, 와타나베가 필생의 업적으로 삼은 것도 오염된 저수지를 어린이 놀이터로 바꾸는 일이다.

'살자'보다 1년전에 제작된 '백치(1951)'가 제목까지 그대로 원작을 따라가며 충실히 도스토예프스키의 줄거리를 재현하다가 상당히 실망스러운 작품이 된 반면, '살자'는'파우스트'에서 기본적인 골격을 빌어왔으면서도 과감한 재해석과 새로운 이야기 구조의 실험을 통해 참신하고 아름다운 영화가 될 수있었다. 구로사와의 중기 대표작 중 미후네 도시로가 나오지 않는 거의 유일한 작품이며, 와타나베 역을 맡은 시무라 타카시가 탁월한 연기를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영화 중반 와타나베가 자기에게 아직도 무언가 의미있는 일을 해낼 시간이 남아있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이 와타나베의 장례식 장면으로 이어지는 시간의 불연속성이다. 구로사와는 자신이 읽었던 한 소설에서 이러한 파격적인 이야기 구조의 힌트를 얻었다고 밝힌다. 구로사와는 언제나 영화적 리듬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달인이었으며, 이 과격한 장면 전환은 마치 고요한 관현악 멜로디가 심벌즈 소리와 더불어 완전히 다른 주제를 연주하는 것과 같은 신선한 놀람을 선사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아주 고전적인 질문에 대한 지나칠 정도로 고전적인 답변이지만, 그것이 결코 고식적이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의 장점이다. 실제로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적지 않고, 어떻게 보면 우리 모두는 시한부 인생이다. 그러나 와타나베처럼 무엇인가 가치있는 일에 짧은 여생을 헌신할 용기를 가진 사람은 매우 드물다. 와타나베는 이런 이유로 영웅이며,구로사와의 초기작 '수가타 산수로'의 영웅과는 다른 종류의 영웅이다. 와타나베는 남들보다 뛰어난 체력이나 지식, 용모를 지니고있지 못하지만, 그는 결국 인생의 참의미를 깨닫고 자신과 싸워 이길 줄 알았던 참다운 의미의 영웅인 것이다.

그러나 이 영웅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후기의 구로사와는 영웅에 대한 관점을 바꾼다. '살자'의 마지막 장면은 구로사와의 이 영웅에 대한 망설임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와타나베는 분명 세상을 바꾸었다. 그의 노력으로 아이들이 뛰놀 수 있는 공원이 만들어 졌고,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더 좋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와타나베 하나의 노력으로 세상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 와타나베가 만든 놀이터를 쓸쓸히 주시하던 그 젊은 공무원은 후에 와타나베같은 용기있는 인간이 될 것인가? 아니면 그 또한 매너리즘의 제물이 되어 인생을 소모할 것인가.

2016-01-22 (금) 박흥진 편집위원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1952)에 대한 단상

노트 2012.06.13 18:18

1.

위암에 걸린 시민과장 와타나베의 x-ray 사진으로 시작하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2년작 <이키루>(生きる, 살다). 암세포가 퍼져 있는 ‘와타나베’의 위를 포착하는 시선은 분명 전쟁 기술의 산물이다. 전후 x-ray는 삶을 투시하는 광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적’을 찾아내서 ‘절멸’시키는 그 기술이 ‘병’을 찾아내어 ‘생(life)’을 연장하고 삶의 의미를 회복할 수 있게 한다. 전후 일본 영화의 대표작이자 구로사와 아키라의 명작 중 한편인 <이키루>의 표제가 가리키는 ‘산다는 것’의 의미 또한 x-ray의 변주와 겹친다. 총력전 체제 이후 전쟁이 일상 속에서 준비된다는 것(도미야마 이치로)은 상식이 되었다. 영화는 만년 시민과장 ‘와타나베’에 의해 전후, 산다는 것의 감각이 어떻게 다시 재발견되는지를 성실한 자세로 묘사하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재발견된 삶의 의미가 무엇을 삭제하고 은폐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냉전(cold war)과 동아시아(regional)라는 프레임을 도입할 때 구로사와 아키라의 <이키루>가 다른 관점으로 독해된다.

2.

이 영화에는 ‘전전’이나 ‘전후’의 문맥이 삭제되어 있지만 전후, 삶의 감각이 무료함이나 제도에 내맡겨버리는 방식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아울러 이 영화가 제작된 1952년이라는 시기를 ‘냉전의 시간표’에 대입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대일 강화조약)을 맺음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식된다. 샌프란시스코 조약의 주요 안건이 표면적으로는 한반도 독립의 승인, 타이완과 펑후 제도(澎湖諸島), 지시마 열도(千島列島) 및 사할린에 대한 권리 포기, 남태평양 제도 및 오키나와와 오가사와라 제도를 미국에게 위임하는 평화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마루카와 데쓰시의 지적처럼 이 조약의 중요한 당사자인 남한과 북한, 중국, 대만 측이 참석하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냉전문화론><리저널리즘>을 참조). 이른바 열전의 시대를 종식하고 냉전의 시대로 돌입하게 되는 이 조약의 한켠에서는 한국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이 비교적 빠른 시간에 전후 복구 체제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은 동아시아가 열전에 휩싸여 있을 때 이를 관망할 수 있는 자리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동아시아에 속해 있으면서 동아시아의 열전을 관망하는 독특한 위치에 자리함으로써 전후 복구 체제를 구축했다. 구로자와 아키라의 <이키루>는 이러한 동아시아 냉전의 시간표를 통해 다시 재구성해볼 필요가 있다.


3.

아내의 이른 죽음(전전 혹은 전중)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위해 평생을 바쳐온 ‘시민과장’의 삶. 삶의 감각이 가족의 문제로 축소되어 있는 듯하지만 이는 전전과 전후의 삶의 감각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아울러 전후, ‘위암’ 판정을 받은 후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는 설정 속에 당시의 일본이 ‘열전’ 상태에 돌입했던 남한과 북한, 중국과 대만과 거리를 두고 미국의 전략적 요충지로 전후 복구가 점진적으로 진행되고 있던 시기라는 것과 함께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암’이라는 ‘위기’에 의해 ‘전전’의 ‘삶의 감각’을 다시 복귀 한다는 것,아니 보다 정확하게 ‘위기’(동아시아의 열전)를 통해 비로소 ‘삶의 감각’을 체득한다는 것은 ‘이키루’(살다)라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열전을 관망하고 있는 ‘자리’를 통해 구축된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 30년간의 공무원생활동안 무엇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와타나베의 토로 속에서 우리는 ‘전전’의 기억을 ‘전후’에 삭제하는 한 방식과 대면하게 된다. 와타나베가 우연히 만난 소설가를 따라 나선 ‘삶의 현장’은 일본에 침투한 미국문화의 현장과 다르지 않다. 재즈와 스윙이 넘치는 거리, 빠칭고와 bar. 전후 미국문화가 깊숙히 들어온 밤문화의 거리가 바로 ‘삶의 현장’인 것이다. “이 순간부터 살아났어”라는 소설가의 말이 가리키는 지점은 삶에 대해 다시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주는 ‘와타나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이 사람은 십자가를 진 그리스도야”) 발디딜틈 없이 홀을 가득 매운 사람들의 물결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와타나베의 헌신적인 노동에 의해 구성된 시민공원 또한 동아시아의 냉전 시간표를 보조선으로 도입할 때(‘보조선의 도입’은 마루카와 데쓰시가 즐겨 쓰는 표현이다) 다른 의미를 내장한 공간이 된다. 죽기 전 살아 있음의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열을 쏟았던 헌신적인 노동은 곧장 전후 재건의 논리과 겹친다. 영화는 부시장을 위시한 공무원들의 무사안일한 작태를 비판함으로써 시민공원의 공적을 와타나베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돌려주는 것을 향해 나아가지만 이때의 시민공원을 구축한 것은 와타나베가 아니라 열전(hot war) 상태에 놓여 있던 대만과 중국, 남한과 북한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영화가 의미부여를 하기 위해 집중하고 있는 와타나베의 헌신적인 노동이 은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되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동아시아적 관점으로 냉전을 보는 것이며 냉전의 관점으로 동아시아를 보는 것이다.

4.

시한부의 삶을 살고 있는 와타나베는 반복해서 ‘시간이 없어’를 되뇌며 한시도 쉬지 않고, 원망도 하지 않고 시민 공원 조성을 위해 애쓴다. 짧은 시간 내에 자신의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것은 흡사 자살특공대 카미카제(かみかぜ)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전전의 카미가제는 전후 소환되어서도 호명되어서도 안 되는 이름일 것이다. 이 영화의 그 어디에서도 카미카제와 같은 맹목적인 자살 특공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쉼없는 노동을 수행하는 병든 육체를 남김없이 소진하여 시민공원을 조성하는 와타나베의 육신, 시간이 없어를 되뇌며 한시도 쉬지 않는, 착륙장치가 없는 그 육체가 전전의 카미카제가 전후에 소환되는 모습이 아닐까? 살신성인, 혹은 희생양은 전전과 전후에 형식을 달리하여 등장하는 셈이다.

와타나베의 영전 앞에서 그의 헌신에 대해 격렬하게 증언한 공무원들은 이후부턴 와타나베의 뒤를 이어 살 것을 맹세한다. 이때 이 영화의 제목인 <이키루>의 본래적 용법이 드러난다. 한 명의 헌신적인 노동에 대해 증언하는 것을 통해 애도를 완수하고 그의 뒤를 잇겠다는 논리 속에 일본의 전후 재건이 열전의 동아시아에 빚지고 있음에도 그 문제를 망각하고 개인의 헌신에 대한 애도로 완벽하게 대체되어버린 형국이 되는 것이다. 와타나베에 대한 애도가 동아시아의 열전을 삭제해버린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의 ‘산다는 것’의 감각은 바로 동아시아의 열전을 은폐하고 삭제함으로써 구축될 수 있다는 것이다. 

良い映画を褒める会。

アクセスカウンタ

zoom RSS        『生きる』(1952)黒澤映画というより日本映画の代表的な一本。年齢を重ねるごとにズシンと響く。

<<   作成日時 : 2013/01/13 15:53   >>

なるほど(納得、参考になった、ヘー) ブログ気持玉 4 / トラックバック 0 / コメント 12

 最初にこの映画を見たのはたしか13歳の中学生のときでした。その後、レンタルビデオを借りてきて、二十代までの若い頃に何度も見た『生きる』は確かに良い映画でしたが、どこか共感できない部分がありました。

 たぶんずっと後ろ向きに生きてきて、煮え切らない人生を送ってきた主人公にイラついたからでしょう。若い頃にはウジウジした大人は嫌いなのが若さなので仕方がない。数年に一度はビデオやDVD、スカパーやBSで見てきたので、もう十回は見たことになります。

 ところが四十歳を過ぎてから二回ほどDVDやスカパー放送を見ましたが、印象はこれまでと違い、グサリと心を突き刺されるような感覚が年々強くなっている。映画の深みも分かってきたように感じます。

画像


 タイトルは「生きる」となっているが、内容は死を迎える前に何をやりきったかという自尊と親子の断絶がテーマなのかもしれません。死と正しく向き合うには本来は宗教だったり、哲学だったりが必要になることが多い。

 無神論的な人間でも死に対しては漠然とした恐怖を抱いているだろう。家族が自分の死を悲しむことなく、ただ残されているだろう遺産の配分のみにしか興味がないと知れば、当人は傷つくだろう。

 可愛がってきた子供たちが他人のはじまりだと思い知らされる瞬間が来たとき、どれほどの者が平静を保てるだろうか。三十代後半以降は未来とは希望に満ちた素敵な時間ではなく、苦痛か失望の要素を数えてしまうことが増えていく。痛みは増えていくが、痛みも生きることの一部です。

画像


 それでもなんとか踏み止まって、笑顔で生きていかねばならないのが大人としての人生の向き合い方なのかもしれません。楽しいことはほんの少しで、あとのほとんどは苦しみというのが仕事であり、家庭なのかもしれない。

 家族皆が健康で、良い人ばかりというのは昭和の理想的なファミリーアニメ『サザエさん』だけでしょう。それでもこの映画が公開された昭和二十年代当時はアメリカに敗北したという自信喪失と貧困生活などの絶対的な物資不足による苦しみがあります。

 平成世代的な感覚だと日本特有の縦社会及び横並びの鉄の掟は依然としてあり、個人の尊厳や自由は無視され、プライバシーは皆無で生活は不便でした、と言い切れるのかもしれない。

画像


 しかしその社会はマイナスばかりではなく、近所同士の助け合いや親身になってくれる身内や友人たちもいたでしょうし、戦友という強い絆もあった訳ですから、戦後社会の縦社会や人付き合いすべてが悪いとは思わない。

 もちろん現在の社会も悪いことばかりではない。例えば、今の若いペーペーのサラリーマンの部屋にはお風呂とシャワーがあり、電化製品は一通り揃っていて、栄養価の高いものがどこにでも売っていて、自宅のDVDで映画をかなりの臨場感でしかもノーカットで楽しめる。

 六十年前にそんな生活を送れた人が日本にどれくらいいただろうか。昔は良かったという人がいる。しかし物質的には誤りであり、資本主義経済でもっとも恩恵を受けているのは我々一般市民なのかもしれません。

画像


 それはともかく、スター俳優とは言い難い、脇役(今なら演技派とか性格俳優とか言われるのでしょう。)だった志村喬が主役を張ったこと自体がエポック・メイキングなのではないか。結果として、俳優・志村喬の代表作となった『生きる』は今でも力強く、人として生きる意味と時間の大切さを我々の心に訴えかけてきます。

 そもそも生きるとはどういうことだろうか。生物学的なことではなく、生きる意味についてです。この映画のテーマはひとりの人間が人生の終わりに直面したときに気づいたそれまでの無為な時間の浪費、残されたわずかな時間を人間としてどう意味を持たせるかという生きざまとは何かを、そしてそれとともに成人してしまった後の子供夫婦との埋められない親子の断絶を描いている。

 この国ではほとんどの成人はよほどの大金持ちでない限りは学校卒業後は会社などの組織に所属し、ある者は転職したり、またある者はそのまま会社や組織に留まり、家庭を築き、子供を育て、定年を迎え、老後の暮らしを始める。

画像


 実質の働く期間は四十年間程度であるが、その期間を常に思い通りに、希望通りに働き続けられる人はまれである。病気、事故、怪我、結婚、育児、非行、離婚、妨害、左遷、失業、倒産、老い、借金など年齢を重ねれば重ねるほどにトラブルの種は多くなり、人生の障害は日増しに増えていくようになっているのが人生です。

 漠然と人生はずっと続いていく。少なくとも数年内に生涯を終えるかも知れないと覚悟している人は若ければ若いほど少ないだろうし、現役世代では考える暇すらないほど忙しい。

 1952年当時の定年退職が何歳だったのだろうかというと、おそらく今現在の60歳ではなく、55歳くらいだったはずです。55歳前に胃ガンと宣告されたらどれだけの人間が平静を保てるだろうか。映画での設定では志村喬の設定はたしか53歳だったと記憶しています。

画像


 子供に相談しようにも、すでに自立していればなかなか会うこともままならない。また同居していても、誰とも会話が出来ないような冷たい家庭もあるようです。周りに人がいるのに孤独をずっと味わわなければならないのはもともと家庭を持っていない独身者よりも苦しさは増すのではないか。

 当時ですら孤独感が強く描かれていたのですから、現在ではなおさらその部分が観客の心に響い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大昔は親子断絶が観客の心に響いたでしょうが、独居世帯が増える現状では孤独というテーマの方が強く響いてくるかもしれません。

 映像で興味深かったシーンをいくつか見ていくと、まずは病院の待合室場面。居合わせた患者と会話する内に胃ガンと自らの余命を確信させられた志村喬のひきつった表情と思い詰めた眼差し、絶望で強張った両肩と丸まった背中が強烈な悲しみを表す。彼を捉えるカメラとあまりにも暗い影のため強調される暗い目がより深刻さを観客に知らせます。

画像


 医者同士や看護婦との会話も生々しい。死期を知っているのに患者には知らせない。当時はそんな感じだったのだろうか。会話はあくまでも他人を突き放したような冷たさが際立っているが、告知されない恐怖もまた真なので、個人的にはたとえそれがあと一ヶ月とかいう場合でも本人への告知はするべきであろうと思います。

 映画の前半では志村の残された人生を意味のあるものに変えるためにさまざまな人々、とりわけそれまでのお堅い役所仕事を続けていた彼が寄り付かなかった夜の仕事や盛り場にいる人々との刹那的な出会いが描かれる。

 毎日、顔を合わせている家族にも告げられなかった病気や余命のことを初めて出会った人々に語るのは一見不思議に見える。ゲーテのファウストに出てくる悪魔メフィストフェレスのような伊藤雄之助に余命や家庭についてありのままを話したり、あまり重要視していなかった女性事務員の小田切みきに心を開く様は奇妙に思える方もいるでしょうが、利害関係がないからこそ聞かせることができる話もあるのでしょう。

画像


 ただし演出上、前半部分を盛り上げてきた伊藤と小田切は後半になると出てこなくなります。それを持って、彼らを使わないのは構成上の問題であると捉える向きもあるでしょうが、彼らと志村とが交友を持ったのはごくごく短期間である。

 志村と直接に関係のない、第三者の他人として彼に問われたことに親身に答えているだけなので、わざわざ葬式の場に伊藤や小田切が顔を出して、謎解きのキャラクターとして登場し、家族や職場の同僚たちに志村の素晴らしさを語ってしまってはこの映画の品格は安っぽいテレビドラマになってしまう。

 死ぬ前に色気づいて、妾さんでも作ったのではないかと邪智されるのは志村の名誉にとっては悲劇的であり、すべてを知る我々観客からすると居たたまれない場面が出てきますが、こういったビターな味わいがあるからこそ、家族でも最後まで分かり合えない断絶の強さが引き立つのではないか。

画像


 そうはいっても他人は所詮他人なので、死に当たっての金銭面や印鑑の準備をしているのはなんだかんだ言っても血は濃いのだなあという印象を受ける。誰もが深く考えねばならないことを浮き彫りにして、各自の心に突き刺してくるのがこの映画のストーリー展開です。

 この映画の珍しさはもうひとつあります。それは主人公が中盤ですでに亡くなっていて、死者の人となりを語る葬式シーンが広間で語られる。和室のふすまをぶち抜いて、通夜の席に座っているが、撮り方も難しいこのシーンを成り立たせるためにはフラッシュバックによる思い出語りはアイデアとして優れていますし、観客の興味と集中を保つためにも良い方法でした。

 名場面が次々に出てくる本物の名作映画でもあります。映画が素晴らしくなるために必要な諸条件、つまり映像としての美しさが卓越していること、物語にグイグイと引き込んでいく力があること、俳優を見ていて心から共感できたり、暗い気持ちになったりと感情移入が出来ること、効果音や音楽が映像と相まって強烈な印象を残してくれること、見た後に心が洗われることなどがすべて揃っているのがこの『生きる』ではないか。

画像


 なかでも誕生日を迎えた女学生を祝福するために皆が歌う『ハッピー・バースデー』を背中に受け、志村が最後に自分がなすべき仕事をする決心をするシーンは彼の人生の再生をも表しています。

 男祭りの映画を撮るのが黒澤映画なのだという印象を持っている方も多いでしょうが、黒澤作品群のほぼ半分はメッセージ色の強いヒューマンドラマが多いので、斬り合いのある時代劇だけではなく、残り半分にも興味を持っていただくきっかけになる作品になると思います。

 映画を盛り上げる音楽も素晴らしい。彼の低い美声がズシッと響いてくる『ゴンドラの唄』は何度聴いても絶望的でせつなくなりますが、見る者へのメッセージは色褪せてはいません。

 生命短し 恋せよ乙女

 赤き唇 あせぬまに

 熱き血潮の冷えぬまに

 明日と言う日の無いものを
 

 なんと哀しい歌なのだろう。キャバレーで歌われるこの歌は恐怖に震えながらも死を受け入れようとした者の覚悟を見せつけられます。恐怖を敏感に感じ取った周りの観客がゾッとして彼から遠ざかっていく様子がとてもリアルに見える。

 ブランコに乗って、小田切みきと楽しげに語り合う名シーンを覚えているファンも多いでしょう。雪が降り積もるなか、完成後の公園でひとりぼっちで歌う『ゴンドラの唄』、そして何と言っても冒頭のナレーションで語られる胃ガンの宣告と彼の妻が霊柩車で運ばれるまでの回想シーンを一気に見せる力業の凄みを素直に楽しみたい。

 胃癌宣告を望み、医師の煮え切らない態度から病状を察して、大きなショックを受けて歩き出し、自動車に轢かれる寸前にハッと気づくシーンは忘れられません。悩みに悩んでいた彼を表す無音状態だったのが一気に音が大きくなって、現実世界に戻ってくる様子は映画の演出としては最高レベルなのではないか。

画像


 無音と騒音の対比が効果的です。他者によるフラッシュバックが多用され、徐々に彼の人間像が語られるが、どれも正解には辿り着かない。志村が死への迷いを捨て去り、死を決意してからの想いと真摯な行動とその動機を理解しているのは我々観客のみである。

 その語り口によって、映画を見ている観客は志村を見守り、時には心のなかで励まし、彼の死に涙する。誰にも真実を知らせないまま亡くなった志村を理解している我々は彼をけっして忘れはしない。

 葬式の時に志村のようになろうと熱く語った役人は木っ端役人に戻ってしまう。それを持って、黒澤演出のシニカルさだと言うことも出来るが、志村の心を知らない彼が下らない小役人に戻ってしまっても無理はない。

画像


 一回目のブランコに乗るシーンは小役人だった自分が意志を持ってやりきった仕事への誇りが溢れ出す栄光の戴冠式であり、小田切みきはハレの舞台の参列者でした。

 二回目の雪の降りしきる場面は死を決意し、悔いなく人生を閉じるための葬式であり、『ゴンドラの唄』は自らによる葬送行進曲なのだろうか。

 志村は家族に若い愛人を作ったと誤解され、葬式にも小田切がやってくるのではないかとヤキモキするが、当然のことながら彼女はやってこない。彼女と志村の関係はロリコン的な見方をされるのかも知れない。

画像


 当時も今も年齢が離れた男女がともに歩いたり、食事をしたりしているとカップルであるか、娘であるかどうかも分からないのに怪訝な顔をされることもある。ただ若くて素直な女の子は可愛らしいし、一緒にいると楽しく感じるのが多くの男性の本音だろう。

 またストリップ・ショーを観に行くメフィストフェレスのような伊藤雄之助や酒場で語らう左卜全を知るのはぼくら観客のみであり、家族は父親であるが、小役人で面白味など何もなかった志村の交友関係を知る由もない。

 役人になってから隠し続けてきた人間臭さをやっと解放できたのが死の宣告を受けてからだったというのがこの頃の多くのサラリーマンだったのではないか。自分のやりたいように生きるなどというのは身勝手に他ならない。

画像


 しがらみでがんじ絡めになって、身動きが取れないというのが本音だろう。すべてを捨て去るのは無責任だろうと心の奥底では自覚しているのが大人の男だろう。

 道端で猫が不思議そうな顔でこちらを覗き込んでいる。家に電話すると、「今日はコロッケだよ。」と言われた。

総合評価 90点

 

출처 : 성토마스모어사상연구소
글쓴이 : 반딧불이螢하제 원글보기
메모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느 가족  (0) 2018.08.26
[스크랩] 음악영화<플로렌스>... 2016 개봉 / 메릴 스트립  (0) 2018.08.22
[스크랩] 아름다운 영화 "Maudie(내사랑)....  (0) 2018.04.17
셰이프 오브 워터  (0) 2018.03.03
지바고  (0) 2018.03.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