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레오나드 라루 선장

tlsdkssk 2017. 7. 27. 17:17




단독] ‘흥남철수 기적’ 라루 선장, 교황청에 ‘성인’ 추천된다… 美가톨릭, 절차 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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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의 영웅’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레오나드 라루 선장의 현역 시절(왼쪽)과 1954년 이후 수도사 생활을 할 당시 모습. 바다의 사도 제공


문재인 대통령의 첫 방미를 계기로 미국사회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흥남철수 사건이 재조명되고 있다. 특히 당시 흥남철수의 영웅 메리디스 빅토리호의 레오나드 라루 선장이 한국인 구조에 열성적으로 앞장선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알려지면서 그의 공로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확산되고 있다. 현지 가톨릭 단체들은 2001년 수도사로 삶을 마감한 라루 선장을 로마 교황청에 ‘성인(聖人)’으로 추천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가기도 했다.

라루 선장은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 1만4000명을 7600t급 화물선 빅토리호에 태워 사흘간 항해 끝에 전원 거제도로 무사히 탈출시켰다. 당시 빅토리호에는 문 대통령의 부모와 누나도 타고 있었다. 문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워싱턴DC에 도착해 첫 일정으로 버지니아 콴티코 해병대사령부에서 빅토리호의 생존 선원 로버트 러니, 라루 선장과 말년을 수도원에서 같이 보낸 조엘 마컬 신부 등을 만나 이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다.

빅토리호의 흥남철수는 ‘역사상 단일 선박으로 가장 많은 인원을 구조한 사건’으로 2006년 기네스북에 올랐다. 미 해군 및 상선 선원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단체 ‘바다의 사도(Apostleship of the Sea)’와 뉴저지 패터슨 교구는 이런 ‘기적적 구조’를 기리기 위해 라루 선장을 성인으로 추천키로 최근 합의했다. 패터슨 교구는 라루 선장이 말년까지 수도사 생활을 한 뉴저지 뉴턴 수도원이 소속된 지역 교구다.

바다의 사도는 지난 3월 25일 패터슨 교구에 보낸 서한에서 “많은 사람이 피난민 중에 적이 섞여 있을까봐 의심하며 구조를 머뭇거렸지만 라루 선장은 피난민들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봤다”며 “그의 행동은 ‘특별한 자비는 생명의 열매를 맺는다’는 걸 일깨워주었다”고 성인 추천 이유를 밝혔다.

바다의 사도는 라루 선장이 훗날 “작은 배에 어떻게 그렇게 많은 사람이 탈 수 있었는지, 그리고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수많은 위험을 극복할 수 있었는지 생각할 때마다 분명한 메시지를 깨달았다”며 “그것은 하나님이 직접 빅토리호의 키를 잡고 있었다는 것”이라고 회고한 사실도 언급했다.

1950년 12월 22일 라루 선장의 지시로 빅토리호 선원들은 흥남부두로 몰려든 피난민들을 화물칸은 물론이고 덮개가 없는 갑판까지 발 디딜 틈 없이 가득 태웠다. 빅토리호가 사나운 겨울바다를 항해하는 동안 배에서 신생아 5명이 탄생해 빅토리호는 ‘기적의 배’로 불렸다. 라루 선장은 이때 받은 감동의 영향으로 한국전쟁 뒤인 1954년 수도사로 변신, 평생을 기도와 노동으로 보냈다.

패터슨 교구의 아서 세라텔리 주교는 최근 바다의 사도에 보낸 답장에서 “라루 선장이 한국인 1만4000명을 구한 영웅적 행동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라고 강조했다. 이들 단체는 라루 선장의 공로를 알리는 활동에 본격 착수했다.

워싱턴=전석운 특파원 swchun@kmib.co.kr

文대통령, 워싱턴서 흥남철수작전 美참전용사 초청   

[스페셜경제=홍민정 인턴기자]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방미 기간 중 6·25전쟁 당시 흥남철수를 성공적으로 이끈 ‘장진호 전투’ 참전용사를 초청한다고 밝혔다.
외교부 강경화 장관은 25일 6·25전쟁 67주년을 맞아 한미연합사단·미2사단을 찾아 “수일 후 문재인 대통령이 워싱턴을 방문하는데, 이 계기에 대통령은 흥남철수 작전의 참전용사 분들을 초청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모는 흥남철수 당시 7600t급 상선에 몸을 싣고 중공군 10만여 명에게 포위된 흥남을 탈출해 거제에 정착했다. 문 대통령은 그로부터 3년후 1953년 1월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문 대통령은 지난 23일 ‘국군 및 UN군 참전유공자 위로연’에 참석해 ‘장진호 전투’와 ‘흥남철수 작전’을 얘기하며 “그 덕분에 흥남에서 피난 온 피난민의 아들이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됐다”고 언급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대선 후보시절 작년 12월 흥남철수 당시 함정에 피난민을 태우도록 미군을 설득한 현봉학 박사 동상 제막식을 찾아 등 참전용사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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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남철수 작전은 6·25전쟁 3대 전투 중 으뜸으로 손꼽히는 ‘장진호 전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장진호 전투는 미국 해병대 1사단이 1950년 11월 북한의 강계를 점거하려다 함경남도 장진군의 호수 인근에 숨어 있던 중공군에 포위돼 전멸할 뻔 했던 전투를 말한다. 인천상륙 작전과 다부동 전투와 더불어 6·25 3대 전투로 평가받는다.
이 전투로 미 해병대는 4,500여명이 전사, 7,500여명이 부상을 입으며 막대한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미 해병대는 필사적인 반격을 가해 12만명의 중공군의 남하를 지연시켰기에 1·4후퇴가 성공적일 수 있었다.
국가보훈처는 장진호 전투를 되새기고, 참전용사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해 지난 5월 미국 버지니아주 콴티코시의 미 해병대국립박물관 앞 공원에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가 있는 콴티코시는 워싱턴에서 남서쪽으로 약 57㎞ 떨어진 곳으로 자가용으로 50분 이 채 되지 않는다. 문 대통령이 이번 방미기간 중 기념비를 찾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정부 고위관계자는 “장진호 전투로 인해 성공할 수 있었던 흥남철수 작전이 아니었다면 본인이 태어날 수 없었다는 문 대통령의 말이 미국 관계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 대통령이 미군 참전용사까지 초청해 감사함을 표현한다면 한미동맹을 굳건히 하는데 긍정적 영향을 발휘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진제공=뉴시스)







Meredith Victory(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 이야기

 

저는 허구의 소설을 별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읽지 않는 것은 아닌데, 그러한 책이 흥미를 잘 갖지 못하는 것이 습성인지라 허구의 소설을 읽기가 지겨운 경우가 많다.

 

유명세를 가진 공지영 작가의 소설에 대해서도 별 호감이 없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가 쓴 수도원일기1에 대해서 사실의 현장에서 쓴 책이기에 호감을 갖고 읽었다. 그리고 지난 연말에 출간한 “수도원 일기2”도, 수고롭게 종로에 나가 책방에서 책을 구매해서 읽었다. 수도원 일기 1보다 더 자기 소리를 많이 해서 거북함도 있었지만 내면의 모습을 적나라에 표현해서 좋기도 했다.

 

 

이 책을 읽다가 놀란 것 한 가지는 지금 극장가에 한창 인기리에 상영되고 있는 영화 [국제시장]에서 첫 번째의 사건으로 다룬 흥남부두 철수작전에 나오는 Meredith Victory(메러디스 빅토리)호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Meredith Victory(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은 1950년 당시 35세의 나이에 선장이 되어, 5년 건조된 7,600톤의 화물선의 선장이 된다. 그는 선장이 된 후 그에게 내려진 첫 명령은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몰아 일본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12일 만에 일본 요코하마항에 정박하여 연료와 전투장비를 가득 채운 후에, 한국 흥남부두로 항해하였다. 당신 한국전쟁의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하는 채 그는 흥남으로 떠나 1950년 12월19일에 정박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자신에게 절체절명(絶體絶命=궁지에 몰려 살아날 길이 없게 된 막다른 처지)의 순간에 한국전쟁사에서도 잊을 수 없는 결단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흥남부두에는 더 이상 받을 디딜 수 없는 만큼 피난민들이 엄청난 추위 속에 몰려 있었다. 이때는 전략상 후퇴하는 미군이 빠른 퇴각을 종용하던 때였다. 또한 이때 중공군은 10km도 안 되는 곳에서 포격을 가하여 다가오고 있는 때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사람들을 태우기 위해서는 갑판에 불을 밝혀야 했는데, 이 행위는 적군에게 ‘나 여기 있소’라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참으로 미친 결단일 수 있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또 문제는 그 바다는 기뢰밭이었기 때문에 어떻게 될련지 모루는 위험한 상황도 염려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배는 승선 정원이 겨우 열두 명으로, 사람을 태우기에 합당치 않는 배의 구조였다. 또 사람을 태우기 위해서는 다른 짐들을 내려야 하는 번거러움도 있었다.

 

이래저래 생각하기 힘든 최악조건의 상황에서 통역자의 조언과 피난민들의 부르짖는 호소에 위대한 결단을 한 것이다. “사람들을 태우시오. 타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이로 인해서 6.25 민족상잔의 비극에서 길이 잊을 수 없는 감동과 감격 그리고 위로와 환희의 아름다운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1950년 12월22일 저녁 아홉 시경에 시작된 승선작업은 밤새도록 진행되어 다음 날 동이 트고 다시 정오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배는 흥남부두에서 빠져 나와 하루 넘게 항해해서 거제도에 1950년 성탄절 전날 이브날에 도착을 하였다고 한다. 이 일은 우리 민족에게 잊을 수 없는 성탄절의 선물과 축복이 된 것이다.

 

 

 

 

그때에 Meredith Victory(메러디스 빅토리)호에 승선한 피난민이 놀랍게도 장장 14,000명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엄청난 사람들이 동토의 땅, 영하20도의 날씨 속에서 북한 땅에서 탈출을 할 수 있게 도운 선장은 레너드 라루 선장이다. 그는 이 엄청난 큰일을 한 이후에 몹시 아팠다고 한다. 일단 병가(病暇)를 얻어 고향으로 돌아가 입원을 했는데 그때 병원에서 베네딕도 수사님들의 봉사활동을 보고 깊을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뉴저지 주에 있는 뉴튼 세인트 폴 수도원에 1956년 12월25일에 입회서를 내고 수도서원을 한 후에 수도사의 길을 가게 되었다고 한다.

 

** ↓↓ 레너드 라루 선장 - 마리너스 수사로서의 47년간의 삶을 살았다.

 

그가 남겨논 위대한 일에 세 가지의 발언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로맨스이다." 

둘째는  "하나님을 추구하는 것은 가장 위대한 모습이다." 

셋째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성취이다."   

 

 

 

 

수사가 된 후에 그의 이름은 “마리너스”로 불리웠다. 그리고 2001년 10월14일에 47년의 수사생활을 끝내고 생을 마감하였다고 한다. 그가 수사가 된 후에 아주 조용한 사람으로 말이 없었던 분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지난날에 한 일을 떠버리거나, 한 번도 자랑한 일도 없었다고 한다. 이게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힘들었다는 것과 축구 찬 이야기 안 하는 사람이 있는가?

 

지금은 벌써 고인이 된 사람 고(故) 홍성천목사가 신학교 때, 가끔씩 파월참전용사로서 각종 전투이야기들을 신나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한 것이 갑자기 생각이 난다. 사람은 자랑하고 싶은 것을 숨기는 것을 얼마나 힘들어 하는가?

 

그런데 레너드 라루 선장은 너무나 큰 업적을 남긴 사람인데도 이를 없는듯이 숨겼고, 그의 업적이 들어나게 된 것은, 오랜 뒤에 미국정부가 훈장을 주기 위해 그를 찾아와 주었을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고, 그가 전쟁의 영웅이었다는 사실을 수도원사람들이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레너드 라루 선장이 참 대단하고 큰일을 한 놀라운 결단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출구가 없는 동토의 땅에서 천하보다 귀하고 귀한 수많은 생명을 위해서 너무나 큰일을 수행하였다는 사실이다. 극에 달한 최고의 극하고 위험한 순간인데도 생명을 위해서 위대한 결단을 내린 정신은 바로 주님의 정신이고, 참 목회자의 정신인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작년 세월호의 사건을 통해서 이준석 선장의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분노하는 마음이었다. 아무리 어렵고 위험한 순간이고 힘든 상황이었을지라도 선장으로서 퇴선 명령을 내렸어야 하지 않는가

 

<옮겨온글>

 

 

 

  

 
         My Love Is Like A Red, Red Rose

 Oliver Schroer의 연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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