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을 버텨낸 '7년의 사랑'[이중섭 탄생 100주년展에 부치는 95세 아내 야마모토의 편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화가 이중섭(1916~1956)이 사흘 뒤 드디어 덕수궁에 온다. 국립현대미술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과 조선일보사 주최로 3일부터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이중섭 탄생 100주년 기념전 '이중섭, 백년의 신화'전이다. 이중섭과 7년간 살 맞대고 살며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95·한국명 이남덕) 여사를 도쿄 세타가야(世田谷)의 자택에서 만났다. 그는 이중섭과의 사랑을 버팀목 삼아 두 아들을 홀로 키워내며 60년을 버텼다. 그와의 인터뷰 내용을 여사가 남편 이중섭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 미군 공습으로 머리 위로 시커멓게 떨어지는 폭탄도 두렵지 않았어요. 그토록 그리던 아고리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으니까요. 그 용기가 어디에서 났을까요. 그거 알아요? '문화학원'에 나와 이름 똑같은 학생이 하나 더 있었던걸. 나중에 친구들이 전쟁통에 아고리 만나러 간 마사코가 자그맣고 조용했던 나였단 사실을 알고 다들 놀랐다지요. 부산에서 다시 기차 타고 서울 반도호텔에 도착해 당신에게 전화 걸었어요. 한달음에 원산에서 달려온 당신의 커다란 손엔 삶은 계란과 사과가 한가득이었어요. 꿀 같은 사과 맛, 아고리의 따스한 품. 70년이 넘어도 생생하답니다. 아고리를 처음 봤을 때가 기억나요. 1939년 문화학원 미술과에 함께 다닐 때 2층 우리 교실에서 당신이 배구하던 모습을 봤어요. 서른 살 만학도 이케다가 "저 사람 훤칠하니 잘생겼구먼" 하기에 곁눈으로 봤지요. 무리엔 조선 유학생 이(李)씨 셋이 있었어요. 턱이 긴 아고리, 키 작은 '지비리(일본어로 꼬맹이를 뜻하는 '지비'와 李'를 합친 말)', 머리에 포마드 잔뜩 발랐던 '데카리(번쩍인다는 '데카데카'와 李'를 합친 말)'…. 하늘나라에서도 이씨 셋이서 배구하나요? 얼마 뒤 팔레트 씻으러 수도에 갔다가 당신과 마주쳤죠. 굵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름 석 자를 알려줬어요. 아고리는 운동도, 노래도, 시도 잘하는 팔방미인이었어요. 모두들 '천재'라고 했지만 뻐기는 법이 없었지요. 원산 신혼 생활은 축복이었어요. 당신은 내게 '남쪽에서 온 덕이 있는 여인'이라며 '남덕(南德)'이란 이름을 붙여줬지요. 시댁 식구 모두 살뜰히 날 챙겨줬고, 이웃 살던 김안라(가수 김정구 누나)씨가 말동무 해주었지요. 하늘이 우리의 행복을 시샘했을까요. 전쟁이란 불청객이 찾아왔지요. 6·25 터지고 그해 12월 미군 물자 수송선 타고 원산에서 부산으로 피란 갔어요. 당신은 화구부터 챙겼지요. 그게 마지막 배였다지요? 그 배를 못 탔다면 '한국의 이중섭'은 없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이듬해 1월 부산에서 다시 서귀포로 옮겼지요. 우리가 도착한 날, 눈 귀한 제주에 함박눈이 쏟아졌어요. 아고리는 태현이 손잡고, 나는 태성이 업고 걷고 또 걸었어요. 배급받은 식량 바닥나면 농가 기웃거리고 마구간에서도 잤어요. "우리 예수님 같네. 허허."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아고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어요. 먹을 게 없어 게를 참 많이 잡아먹었어요. 밀물 들어온 줄도 모르고 정신없이 잡았지요. 한라산 보이는 들판에서 부추 따서 허기 채우고. 당신이 그랬지요. 게의 넋을 달래려 게를 그린다고. 피란 시절 당신은 밤중까지 부두 노동자로 일했지만 붓을 놓지 않았어요. 아고리는 그림을 위해 태어난 사람이었어요. 이듬해 당신이 선원증을 구해 일주일간 도쿄에 왔을 때 세상 다 가진 듯 기뻤어요. 선원증으로는 원래 히로시마항에 내릴 수만 있고 도쿄까지 올 수 없었는데 친정어머니가 친분 있던 히로카와 고젠 농림 대신에게 "장래가 촉망되는 화가니 신원 보증해 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만날 수 있었지요. 그게 마지막이란 걸 알았다면 가족 사진 한 장이라도 남기는 건데, 내내 후회했어요. 1956년 집으로 시인 김광균씨가 보낸 전보가 날라왔어요.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터라 불길한 예감이 스쳤어요. 세상에, 당신이 죽었다니…. 눈을 비비고 몇 번이나 다시 봤어요. 한달음에 서울로 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국교 단절 때문에 갈 수 없었어요. 한 해 뒤 구상, 양명문 선생이 도쿄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행사에 오는 길, 한 줌 재로 변한 당신의 유골 일부를 들고 왔어요. 178㎝ 기골 장대했던 당신이 한 움큼도 안 되는 재로 돌아오다니, 그 절절한 그리움의 끝이 이토록 허망하다니…. 대답 없는 당신을 향해 한참을 흐느꼈어요. 당신 없는 세상은 힘겨웠지만 외롭지만은 않았어요. 아고리가 남기고 간 두 아이가 내 마음의 기둥이 되어 주었으니까요. 어찌어찌 키우다 보니 여기까지 왔고요. 사람들이 종종 물어요. 당신과의 결혼, 후회하지 않느냐고. 전쟁이 없었더라면 우리 인생이 달라졌을 수는 있겠죠. 하지만 아고리, 나는 우리의 사랑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과 함께할 거예요. 우리는 운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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