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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직 남편만을 사랑했던 `프리다 칼로`

tlsdkssk 2016. 5. 31. 07:23
 
    프리다 칼로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에게 남편인 디에고 리베라는 도대체 어떤 존재였을까? 어떤 존재였기에 자신의 전 생애를 받쳐 사랑하고 증오하며, 상처 받고 절망하면서도 또한 그토록 갈망했던 것일까. 리베라와의 결혼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쳐도 그 운명은 그녀에게 너무나 가혹했다. 자신의 전부이자 우주라고 생각했던 리베라는 끊임없이 그녀를 배신했고, 심지어는 그녀의 친구, 동생에게까지 유혹의 손길을 뻗쳤으니... 그 절망과 분노, 상실감과 외로움을 어찌 홀로 감당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하느님께선 견딜 수 있는 시련만을 우리에게 주시는 법, 그 상처의 옹이들은 그녀를 단련시켰고 그림을 향한 용광로에 불을 부쳐 그녀는 혁명가로서, 화가로서 활화산같이 뜨거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붉은 옷을 입은 자화상 (1926 년) - 멕시코의 국민화가 프리다 칼로 (1907.7.6 ~ 1954.7.13)는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유태계 독일인 아버지 빌헬름 칼로와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어머니 마틸데 칼데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녀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칼로가 성장하던 시기는 혁명의 열기가 가득하던 시절이었고, 프리다의 어머니는 멕시코 혁명 당시, 농민 지도자인 자파의 부하들 을 보살펴 준 것을 계기로 죽을 때까지 골수 스탈린주의자였다. 그녀는 매우 열정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며 프리다 역시 그런 어머니의 성격을 물려받았다. 1913 년 6 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에 장애가 생겼고, 그로 인해 친구들에게 '나무다리 프리다'로 불리기도 했었지만 영리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자랐다. 프리다는 멕시코 최고의 교육기관이던 에스쿠엘라 국립 예비학교로 진학을 했는데 그녀의 꿈은 생물학과 해부학 등을 공부해 장차 의사가 되는 것이었다. 그녀는 카추차라는 학생 클럽에 가입하여 활동하던 중 '알레한드로 고메스 아리아스'라는 소년을 만나 첫사랑을 한다. 프리다는 이때 학교 강당에 벽화를 그리러 온 리베라를 보게 되는데 그때 리베라는 멕시코 혁명을 대표하는 미술가라는 명성과 함께 자유분방한 여성편력과 돌출적이며 기괴한 행동으로 식인귀라는 별명으로 불리우고 있었다.
전신 깁스를 한 채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가 18 살이던 1925 년 9 월, 그녀는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하교길에 탔던 버스가 전차와 부딪히면서 강철봉이 그녀의 옆구리를 뚫고 들어가 척추와 골반을 관통해 허벅지로 빠져 나오며 소아마비로 불편했던 오른발을 짓이겨버린 것이다. 의사들은 그녀가 살아있는 것 만으로도 기적이라면서 프리다가 다시 걷게 될지에 대해선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상태라고 말한다. 무려 9 개월 동안 그녀는 전신에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지내야만 했고, 자신의 모든 꿈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깁스를 한 채 침대에 누워 두 손만 자유로웠던 칼로에게 부모님은 침대의 지붕 밑면에 전신 거울을 설치한 캐노피 침대와 누워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이젤을 마련해 주었다. 그날부터 칼로는 거울에 비친 자신을 주시하고 관찰하며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그녀는 평생동안 스스로가 모델이 되어 총 143 점의 작품 중에서 무려 55 점이나 되는 자화상을 그리게 된다. -사고로 인한 신체적 고통과 남편 리베라 때문에 겪어야 했던 사랑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심리 상태를 관찰하고 표현했던 자화상을 많이 그릴 수 밖에 없었으리라.-
    자화상 (1930 년) 프리다는 자신의 자화상에 대해 이렇게 말하곤 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한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바로 나이기에 나는 나를 그린다." 걸음을 걷기 위한 수 차례의 수술이 이어졌고, 그녀는 마침내 기적처럼 다시 걷게 된다. 그러나 수술 후의 후유증은 평생 그녀를 따라다니며 괴롭힌다. 척추사고로 병상에 누워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녀는 문득 깨닫게 된다. 바로 자신이 그림을 그리라는 운명에 이끌려 여기 이 자리 까지 오게된 것임을...
    버스 (1929 년) 미술교육을 제대로 받은 적이 없는 프리다 칼로에겐 자신의 그림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줄 누군가가 필요했고, 사진 작가인 티나 모도티의 소개로 그녀는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프리다 칼로의 그림을 본 리베라는 "프리다의 작품에서 인물 특성에 대한 명쾌한 묘사, 넘치는 에너지를 보았다. 감각적이면서도 생생한 관능성이 느껴진다.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 임에 틀림없다." 라고 평한다. 리베라는 화가의 꿈을 꾸고 있는 프리다에게 날개를 달아주었고, 두 사람은 곧 사랑에 빠져 1929 년 8월, 22 세의 프리다는 자신보다 21 년 연상인 리베라와 결혼한다. 이미 두 번이나 결혼한 적이 있는 리베라와 프리다의 결합을 사람들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이라고 말했다. - 부모님들은 이 결혼을 차마 말리지 못했다. 이제 더 이상 프리다의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는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디에고 리베라의 초상화 (1937 년) 그러나 한 남자의 아내로서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기를 바랬던 프리다의 바램은 그저 희망사항에 불과했다. 이미 수많은 여성 편력을 가지고 있던 리베라는 결혼 후에도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외도를 계속한다.
    프리다와 디에고 (1931 년) 프리다 칼로는 리베라가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조차 없었다. 리베라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전 생을 바쳐서라도 무엇이든 해주고 싶었고, 리베라 또한 프리다가 자신의 반쪽 임을 의심치 않았으며 그녀를 늘 자유롭게 놓아두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리베라는 프리다의 깊은 사랑이나 편안함, 관대함과 따뜻함, 그 무엇으로도 결코 붙잡아둘 수 없는 너무나 통속적인 남자였다. 프리다는 리베라의 외도가 잦아질 수록 더욱 간절한 마음으로 리베라의 아이를 낳고 싶어한다. 허지만 교통사고로 망가진 그녀의 몸은 아이를 낳을 수 없었다. 몇 차례의 유산은 결국 그녀에게 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절망감만을 안겨준다.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선 위에 서 있는 자화상 (1932 년) 1939 년 피에르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 작품을 출품한 프리다는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으로부터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을 받았으나 프리다 자신은 " 제 작품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가장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둔 것입니다." 라고 주장한다.
    여동생 크리스티나의 초상 (1928 년) 리베라의 숱한 여성편력을 참고 이해하고자 노력했던 프리다 였지만 이제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그것은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가 형부인 리베라와 외도를 했노라고 울면서 고백 했기 때문이었다.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되는 일을 자행하고도 태연했던 리베라와 동생에 대한 깊은 배신감... 프리다는 여태껏 리베라의 아내로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던 자신의 역할을 훌훌 벗어 던져버린다. 이때의 심경을 그렸던 작품이 바로 <몇 개의 작은 상처들>이다.
    몇 개의 작은 상처들 (1935 년) 그녀는 남편을 떠나 홀로 여행을 떠난다. 조각가, 사진작가들의 애인이 되기도 하고, 같은 동성의 여인과 사랑을 나누기도 하면서... 하룻 밤도 술 없이는 잠들지 못했고 폭음때문에 건강마저 점점 악화되었다. 그러면 그럴 수록 리베라에 대한 그리움은 동굴처럼 깊어 갔다. 사랑하면서도 리베라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고통이 그녀의 가슴을 천 갈레 만 갈레로 찢어 놓았다. 어느 한 순간, 프리다에게도 자신을 매혹시켰던 강렬한 만남이 있었다. 레닌이 죽은 후 당의 노선을 놓고 스탈린과 대립하다가 1929 년에 소련에서 추방당한 트로츠키였다. 터키, 프랑스, 노르웨이를 전전하고 있던 트로츠키를, 당시 멕시코 대통령이던 카르데나스에게 부탁해 리베라가 멕시코로 망명토록 주선했던 것이다. 리베라는 트로츠키 부부에게 프리다의 친정집인 '푸른집'을 제공 한다. 이 불세출의 혁명가 트로츠키에게 프리다는 매료된다. 그건 어쩜 러시아 출신의 혁명가로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고 평생동안 그 사상을 위해 투쟁하였던 트로츠키에 대한 경외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트로츠키 또한 강렬한 개성과 뜨거운 열정을 가진 프리다에게 끌리는데...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물이 내게 주는 것 (1938 년) 1939 년 리베라는 프리다에게 이혼을 요구한다. 자신을 떠난 그녀에게 배신감을 느꼈거나 아님 그동안 자신의 모든 흠을 무조건 이해하고 용서해 주던, 관대하기 그지없던 프리다에게 나는 너 없이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과시를 하고 싶었던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비록 리베라 곁을 떠나왔지만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리베라 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마음 먹었던 프리다의 소망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덧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머리카락을 잘라낸 자화상 (1940 년) 이혼을 받아들인 후 프리다의 영혼은 점점 피폐해져 갔다. 리베라를 향한 질투와 배신감에 온 몸이 산산조각 날지라도 자신은 늘 리베라의 곁에 있어야 된다고, 그가 없는 세상은 어둠과 절망 뿐이라고 생각하며 리베라 곁에 있기를 소망한다. 그즈음 그녀를 계속 괴롭혀 왔던 척추의 통증이 심해지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대수술을 했지만 그녀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졌다. 이혼한 지 1 년 후 미국에서 수술을 마친 칼로에게 리베라가 찾아왔다. 그들은 경제생활과 성생활을 함께 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40 년 8 월 다시 재결합한다.
    나의 앵무새들과 (1941 년) 리베라와 두 번째 결혼 후의 삶은 겉으로는 비교적 평온했다. 고향 코요아칸에서 개와 원숭이, 앵무새를 기르면서 프리다는 서서이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그림을 계속해서 그렸으며 학생들에게 미술도 가르쳤다. 뉴욕과 파리의 전시회 이후 국내외 적으로 명성도 높아갔다. 리베라의 아내가 아닌 화가 프리다 칼로로서의 입지도 확고해 졌다. 리베라의 외도는 여전했지만 그건 이제 관심 밖의 일이었다. 칼로 후벼파는 듯한 육체적 통증이 이어져 그녀에겐 이미 자신의 척추와 그림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침대에서 그림을 그리는 프리다 칼로 1940 년대 말부터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칼로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잘라내야만 했다.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은 실패를 거듭했다. 프리다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내야만 했으며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있을 수 있었다.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그녀는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루에 서너 시간씩이라도 꼭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1948 년 멕시코 공산당에 다시 입당한다. 그녀의 정치적 성향은 말년의 그림들에 표현되어 있다. 세상을 떠나기 전날 밤 프리다는 디에고에게 17 일 가량 남은 결혼 25 주년 기념반지를 미리 주었다. 디에고가 "왜 반지를 벌써 주는 거야?" 하고 묻자 프리다가 대답했다. "머지않아 당신 곁을 떠날 것 같아서요..." 그리고 1954 년 7 월 13 일 새벽, 프리다는 폐렴증세의 악화로 고통과 고독 속에서 보낸 47 년의 생을 마감한다. 그녀가 쓴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1970 년대 페미니즘 운동이 대두되면서 그녀의 존재가 새롭게 부각되기 시작했고, 1984 년 멕시코 정부는 그녀의 작품을 국보로 분류하였다고 한다.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 (1948 년)
    상처받은 사슴 / 나는 가련한 작은 사슴 (1946 년)
    모세 (1946 년) 프리다 작품 중 가장 위대하면서도 난해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공모전에서 2 등상을 받은 작품으로 프리다 특유의 감성으로 위대한 인간의 탄생과 종교,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을 한꺼번에 담은 작품이다. 예수님부터 시작해 부처님, 다비드, 성모마리아님, 간디, 스탈린, 히틀러...등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나의 아버지의 초상 (1951 년)
    삶이여 만세 (1951 년)
    드러난 삶의 풍경 앞에서 겁에 질린 신부 (1943 년)
    지상의 과일
    부서진 기둥 (1944 년)
    떠있는 침대 (1932 년)
    우주, 대지, 디에고, 나, 세뇨르 솔로틀의 사랑의 포옹 (1949 년)
    원숭이와 함께 있는 자화상 (1943 년)
    땋은 머리를 이고 있는 자화상 (1941 년)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1943 년)
    유모와 나 (1937 년)
    풀어 헤쳐진 머리와 자화상 (1947 년) - 여기 내가 그린 나,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프리다 칼로다. 나는 서른 일곱이고 1947 년 7 월, 멕시코 코요아칸, 바로 내가 태어난 곳이다.
    기억 / 심장 (1937 년)
    희망이 없는 (1945 년)
    엘뢰서 박사에게 헌정하는 자화상 (1940 년) 추신 - 이순님의 프리다 칼로에 대한 사랑이 남다르셔서 프리다에 대한 자료를 조금 더 찾아봤습니다. 세상의 어떤 아내가 자신의 남편을 이리도 절절히 사랑할 수 있을까요...
    출처 : ♣ 이동활의 음악정원 ♣
    글쓴이 : 감꽃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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