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속칭 말하는 “화가 난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울화통이 터진다.”라고
말할 때, “화”자가 특별한 한자일 것 같은데 그냥 불 화 “火”이다.
결국 화가 난다는 몸속이 불이 나고, 불길이 치밀어 오르고, 용암이 터진다는 말이다.
불이 나면 당연히 꺼야 한다.
그것도 작은 불씨가 큰 불씨로 커지기 전에 꺼야 한다.
본인 스스로 그 불을 끌 능력이라든가, 주변에 불을 끌 소화기가 없는 상황이라면, 119에 전화를 해야 한다.
자신이 그 불을 끄지 못하면, 타인의 힘이라도 빌려야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린 그렇게 하고 있는가?
분명 개인마다 다르다.
너무 화를 잘 내는 이가 있고, 그 어떤 일에도 화를 내지 않는 이가 있다.
정말 화를 내서 주변을 확 집중시켜야 할 때도 있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화를 내야 할 때도 있다.
비록 기분은 좋지 않지만 원활한 진행을 위하여 화를 참아야 할 때도 있고, 행여나 상대가 상처를 받을 까봐 그의 미래를 위하여 화를 참아야 할 때도 있다.
반대로 혼자 괜히 욱하여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할 분위기에 혼자 화를 삼켜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 어떤 것이 옳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동전의 양면이 있는 것이니까.
하지만 분명 화(火)에도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본인 자신 때문에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경우도 있고, 타인에 의하여 화가 나는 경우도 있다. 본인에게 나는 화는 긍정적인 요인이 많다고 본다. 나의 부족함이 보일 때 주로 화가 난다. 하지만 그때는 도자기를 굽기 위하여 가마 속에 타오르는 불꽃이라고 생각한다.
때리면 부서지는 흙이었던 그릇이 가마 속에 있는 불꽃에 구워져 도자기로 탄생하듯이, 보다 내 자신을 단단하게 만들어준다.
물론 그 화가 너무 지나칠 경우 자괴감이 떨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하지만 그 화를 잘 조절만 한다면 보다 강해진 자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문제는 타인에 의하여 화가 나는 경우다.
이 점에 있어서는 [울화통 캠프]의 저자 보관스님도 예외는 아니신 것 같다.
여러 경우 중에서 가장 억울하면서 화가는 케이스는 본인의 의도와는 별개로 타인이 다르게 받아들일 경우. 이럴 때 누구한테 하소연 할 수도 없고, 이미 나의 의도를 오해해버린 이에게 일일이 소개하는 일도 불필요한 짓이다.
이럴 때 말 못할 화가 치밀어 오르기 마련이다.
그런 상황 속에 놓인 보관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 세상에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똑같은 상황을 보고 나와 타인은 다르게 이해하였다. 그
리고 서로 이해한 방식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결국 그 상황을 바라보는 이들이 시선, 판단, 평가차이인 것이다.
그 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만이 자신의 화를 제어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한쪽이 뭔가 분명하게 잘못했을 때 우리는 싸우지 않습니다.
잘못을 일으킨 사람이 사과를 하고 곧 해결을 하지요.
서로의 입장 차이를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계속 싸웁니다.
‘틀린’ 사람은 없고 ‘다른’ 사람만 있기 때문에
정답이 없는 문제를 놓고 매일 입씨름을 반복하는 겁니다.
보관스님의 [울화통 캠프] 中에서 p.128
나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 사람과 만나고, 사람과 부딪히고, 사람과 어울리며 사는 사회다. 결국 우린 그 속에서 홀로 일 수 없으며, 나와 틀린 이가 아닌 다른 이와 살아가야 한다.
무조건 자신이 옳다는 보장도 없고, 남이 틀리다는 보장도 없다.
서로 입장이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지혜는 그 차이를 충분히 인정한 다음 생각하고 판단하라고 보관스님은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다음에 분통을 터뜨려도 절대 늦지 않다는 것이다.
화를 참으면 안 된다. 그 화를 마음속에 담아두어서도 안 된다.
그렇다고 하여 올바르게 화를 내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도 좀 웃긴다.
그 방법 보다는 우리가 왜 화가 나는지 그 요인을 알아가는 방법이 더 중요하다.
그렇다면 그 화라는 자체를 막을 수 있고 제어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