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허형만 시인·목포대 국문과 교수 (kll@dorim.mokpo.ac.kr)
식물이 죽으면 다시 땅에 묻힌다,
인간의 발도 흙으로 되돌아간다,
오직 날개만 죽음을 피해 달아난다.
세상은 유리알 공간,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
투명한 것, 자명한 것은 이해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믿으며 산다
한 번도 멈춘 일 없는 밝은 빛을.
내가 새에게서 배운 것은
목마른 희망이다
정확한 기대다, 비상의 진리.
위의 시는 빠블로 네루다의 시 <비상>의 마지막 부분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네루다의 폭발적인 상상력 중의 한 부분인 셈이다. 인간이면 누구나 꿈꾸는 비상. ‘죽음을 피해 달아’날 수 있는 것이 오직 날개뿐이라면 그 날개로 날아야 한다. ‘날지 않으면 길을 잃’기때문이다. 인간은 인간인 죄로 날개가 있는 새에게서 ‘목마른 희망’을 배운다. 그것은 곧 인간으로서 한 생을 지탱하는 힘에 다름 아니며 정신의 상징이다. 우리는 정신(spirit)이 마음(mind)이나 혼(soul)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왜냐하면 정신은 한 인간의 의지이자 역사의식의 또다른 표현이기 때문이다. 네루다 시의 매력은 바로 이 점에 있다.
네루다는 1904년 칠레의 조그만 시골마을인 빠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사인 어머니와 열차 기관사인 아버지는 가난한 삶을 살고 있었기에 네루다는 어려서부터 가난을 체득했다. 그래서 훗날 사회문제와 연관된 민중적 시를 쓰게 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두살 때 칠레의 최남단 떼무꼬로 부모를 따라 이사한 이후 열다섯살 때까지 아라우칸음 인디언들과 접촉하면서 성장했고 밀림을 뚫으며 철로 놓는 작업에 종사한 아버지를 보고 개척정신을 배우면서 훗날 역시 폭발적인 상상력에 의한 생동감
넘치는 시를 쓸 수 있게 된다.
그는 1924년 시집 <스무 편의 사랑의 시와 하나의 절망의 노래>를 발간함으로써 시인으로서의 가치를 확인 받는다. 그후 ‘어떤 속박 속에서도 해방을 찾는 전 아메리카의
서사시’로 격찬 받은 시집 <총가요집>을 발간한다. 총 15편의 노래 및 송가(canto)로 구성되어 있는 이 시집에는 고향의 자연에 대한 칭송과 영웅적인 농부들, 그리고
이름 없는 노동자들을 찬양하는 <칠레의 총가요>와 ‘대서사시 중의 소서사시’라고
일컬어지는 걸작 <마추 삐추의 산정>이 수록되어 있다.
1938년, 네루다는 중남미와 모국 칠레 민족을 테마로 한 서사시 작업에 착수한다. 그리하여 무려 12년이나 걸려서 일만 오천 싯귀가 넘는, 많은 평자들이 네루다의 최고
걸작으로 간주하는 기념비적인 수작 <마추 삐추의 산정>을 완성한다.
허공에서 허공으로, 하나의 비인
그물망 같은
거리와 거리, 환경 사이로 왔다가, 왔다가 헤어지다가
가을이 올 것 같은 마음에 잎사귀 잎사귀의
활짝 편 푸른 동전도 마다하고, 봄과 그 찬란한 꽃들 사이
가장 커다란 사랑이 길다란 만월 같은 약속을
떨어지는 장갑 같은 내 손에 쥐어주는 것도 마다하고.
열 두 편의 시 중 첫번째 시이다. 서시에 해당하는 이 시에서 시인의 삶은 “허공에서 허공으로, 하나의 비인/그물망 같은/거리와 거리, 환경 사이로 왔다가, 왔다가 헤어지다가”를 반복하며 방황한다. 변덕스러운 계절이 주는 이미지와 시인의 정신적인 방황은 마침내 “지각의 가장 강한 성감대가 있는 그곳”, 즉 가장 밑바닥의 지층으로 내려간다. 이 첫번째 시는 그리하여,
그 깊은 파도 속에 이마를 묻고,
유황빛 평화 사이로 물방울처럼 내려갔지,
그리고, 눈먼 소경처럼, 닳아진 인간의 봄 속
향그런 자스민 꽃 곁에 도착한 거야.
하며 끝맺는다. 시인이 “물방울처럼 내려”간 마지막 지층의 자리는 “닳아진 인간”으로 상징되는 민중이었던 것이다. 비로소 민중 속으로 내려온 그는 “향그러운 자스민 꽃”향기를 맡게 되면서 “꽃이 꽃에게 높은 생명의 싹을 전하고/바위가 금강석과 모래로 다듬이질 당한 옷에/그 꽃을 뿌려 이어 이어가듯,/사람은 일정한 바닷물 줄기에서 주운/빛의 이파리를 오그려/손아귀에 팔딱이는 금속을 뚫”(Ⅱ)음을 알게 된다. “꽃이 꽃에게 높은 생명의 싹을 전하”는 우주 자연의 섭리는 곧 민중의 질긴 생명력에 다름 아니다. 민중의 의식과 정신은 “빛의 이파리”로 “금속을 뚫”을 수 있다는 시인의 의지와 신념은 오히려 처참한 인간의 삶과 죽음 앞에서 더욱 견고해지는 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은 옥수수처럼 끝없는 창고 속에 퍼부어지고 있었지
처참한 사건과 실패의 곡간 속
하나에서 일곱, 여덟까지
죽음도 하나가 아닌, 수많은 죽음이, 하나 하나에게 주어졌지:
날이면 날마다 빈민굴 진흙탕 속에 꺼져 가는
등불, 구더기, 그 작은 죽음, 죽음, 날개가 커다란 조그만 죽음이
작은 칼처럼 사람마다 파고들었지
-[Ⅱ] 일부-
네루다의 인간에 대한 연민은 극치에 달한다. 처참한 사건, 실패의 곡간, 하나가 아닌 수많은 죽음 그리고 “날마다 당하는 숨막힌 불행”(Ⅲ)을 보고 그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 “인간이란 무엇이었던가? 툭 트인 대화의 그 어느 곳에/백화점과 호루라기 소리 속, 그 어느 금속성 움직임 속에 부서질 수 없는, 죽어 사라질 수 없는 것, 생명이 살아 있었던가?”(Ⅱ)하고 묻는다. 아니 묻는 게 아니라 차라리 절규한다 함이 더 마땅하리라. 이 절규는 “돌 위에 돌, 인간, 어디에 있었던가?/대기 속의 대기, 인간, 어디에 있었던가?/시간 속에 시간, 인간, 어디에 있었던가?”(Ⅹ)에서 더욱 전율을 내포한다. 그는 이 절규와 전율이 뒤범벅된 질문의 대답을 찾아서 저 압제의 지층으로부터 골짜기를 타고 마추 삐추의 지상으로 올라온다. 올라와 그는 외친다. “오르자, 나와함께, 아메리카의 사랑이여”(Ⅷ)하고. 그리고 “올라와 나와 함께 태어나자, 형제여”(ⅩⅡ)하고 권고한다. 이 마지막 12편을 보자.
올라와 나와 함께 태어나자, 형제여.
내게 손을 다오 그 깊은
너의 고통이 뿌려진 그곳으로부터
바위 밑바닥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땅 밑의 시간으로부터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굳어진 너의 목소리가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구멍 뚫린 너의 눈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땅 밑으로부터 날 봐 다오,
농부여, 방직공이여, 말없는 목동이여:
사나운 고슴도치를 길들이던 친구여:
일어나는 발판을 만드는 미장이여:
안데스의 눈물을 길러오는 물장수여:
손가락이 다 뭉개진 보석공이여:
씨앗 속에 떨고 있는 농부여:
네가 별른 점토 속에 녹아버린 도자기공이여:
이 새로운 삶의 잔에
땅에 묻힌 너희 오랜 고통을 가져 오라.
총 45행 중 전반부에 불과하지만 네루다의 시정신과 민중에 대한 염원은 이 마지막 12편에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이 서사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힘은 바로 ‘인간해방’ 정신에 있다. 마추 삐추로 상징되는 민중의 숨결은 세계 인류사에서 그 누구나 겪었고, 겪고 있으며, 앞으로도 겪을 불길임에 틀림없다. “내게 침묵을 다오, 물을 다오, 희망을 다오./내게 투쟁을 다오, 화산을 다오”라고 부르짖는 네루다의 목소리는 아직도 이 지구상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쉰다. ‘민중의 벌거숭이 가슴’을 만진 빠블로 네루다. 그는 라틴 아메리카의 운명과 꿈을 시로써 생생하게 구현시킨 업적으로 1971년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1978년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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