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흐르는 상자

강은교 시 모음

tlsdkssk 2016. 1. 4. 09:57

우리가 물이 되어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에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귀뚜라미 한 마리 걸어오네
너풀거리는 두 개의 더듬이
등에 찰싹 붙어버린
두 개의 날개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달이 떴는데
미끄러지지 않는 그림자 하나
무릎에 앉혀
- 이제 겨우 풀 하나를 지나갔군
타박타박
붉은 저녁 너의 무덤가
-그 풀은 너무 억세었어
-서로 싸우고 있었어
-허리를 비비대며
-글쎄, 싸우고 있었다니까
내 가슴
어둠 겹겹
붙잡고 붙잡네
놓아주지 않네
사랑의 비늘 하나! 
 

 

 

사랑법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는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 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 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물방울의 시                                            
 
펄럭이네요.
한 빛은 어둠에 안겨
한 어둠은 빛에 안겨
지붕 위에서 지붕이
풀 아래서 풀이
일어서네요, 결코
잠들지 않네요.

 

달리네요.
한 물방울은 먼 강물에 누워
한 강물은 먼 바다에 누워
거품으로 만나 거품으로
어울려 저흰
잊지 못하네요.

 

이윽고 열리는 곳
바람은 구름 사이 문 사이로 불고
말없이 한 별
허공에 일어나
부르네요.

 

눈뜨라 오 눈뜨라
형제여.


 

 

연애                                                      
 
그대가 밖으로 나가네
등불 하나를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를 따라 깊어진 어둠도 밖으로 나가네
문에는 든든한 네 개의 열쇠를 채우고
늙어오는 길과
늙어 있는 길을 지나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둘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이 다정한 뭍의 死者들
자정엔 헛소리를 꺼내 드는
아, 이 바닥없는 뭇 잠의 추억들

 

그대가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네
등불 셋을 켜네

 

뒤에서 빗방울이 달려오네
그대가 돌아오지 않네 
 

 

 

아주 오래된 이야기                                   
 

무엇인가 창문을 두드린다
놀라서 소리나는 쪽을 바라본다
빗방울 하나가 서 있다가 쪼르르 떨어져 내린다

 

우리는 언제나 두드리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이 창이든, 어둠이든
또는 별이든

 

 

 

흐린 날은                                               
 

흐린 날은 수평선 위에 누워 있는 허공을 바라보며
산다. FM에서 부드러운 음악이 울리기 시작하는 저녁
무렵이 되면 새파란 불빛들이 그 허공 밑 바다 위에
켜지기 시작한다. 새파란 불빛들이 켜지는 배들은 곧,
내가 결코 닿을 수 없는 불의 성(城)이 된다. 허공은
깜깜함으로 변하며 거기 불빛들은 별처럼 박힌다.
나는 어디인가로 통신을 하고 싶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신호를 던지며.... 그래서 그 배들의 잔치에 참
여하고 싶은 것이다......우리는 어디엔가 참여하고
싶은 것이다. 
 
 

 

고독                                                        
 

잠자리 한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두 마리가 웅덩이에 빠졌네
쭈글쭈글한 하늘이 비치고 있었네
서성대는 구름 한 장, 구름 곁 바람이
잠자리를 덮어주었네

 

잠자리 한 마리가 울기 시작했네
잠자리 두 마리도 울기 시작했네
놀란 웅덩이도 잠자리를 안고 울기 시작했네

 

눈물은 흐르고 흘러
너의 웅덩이 속으로 흐르고 흘러

 

너를 사랑한다.


 

 

내 만일                                                  
 

내 만일 폭풍이라면
저 길고 튼튼한 너머로
한번 보란듯 불어볼 텐데...
그래서 그대 가슴에 닿아볼 텐데...


번쩍이는 벽돌쯤 슬쩍 넘어뜨리고
벽돌 위에 꽂혀 있는 쇠막대기쯤
눈 깜짝할 새 밀쳐내고
그래서 그대 가슴 깊숙이
내 숨결 불어넣을 텐데...


내 만일 안개라면
저 길고 튼튼한 벽 너머로
슬금슬금 슬금슬금
기어들어
대들보건 휘장이건
한번 맘껏 녹여볼 텐데...


그래서 그대 피에 내 피
맞대어볼 텐데...


내 만일 종소리라면
어디든 스며드는
봄날 햇빛이라면
저 벽 너머
때없이 빛소식 봄소식 건네주고
우리 하느님네 말씀도 전해줄 텐데...
그래서 그대 웃음 기어코 만나볼 텐데... 
 
 
 

 

동백                                                      
 

만약
내가 네게로 가서
문 두드리면.


내 몸에 숨은
봉우리 전부로
흐느끼면.


또는 어느 날
꿈 끝에
네가 내게로 와서


마른 이 살을
비추고
활활 우리 피어나면.


끝나기 전에
아, 모두
잠이기 전에. 
 


벽속의 편지..눈을 맞으며                             
 

눈을 맞으며 비로소
눈을 생각하듯이
눈을 밟으며 비로소
길을 생각하듯이


그대를 지나서 비로소
그대를 생각하듯이 
 
 

 

 

별                                                         
 
새벽 하늘에 혼자 빛나는 별
홀로 뭍을 물고 있는 별
너의 가지들을 잘라 버려라
너의 잎을 잘라 버려라
저 섬의 등불들, 오늘도 검은 구름의 허리에 꼬옥 매달려 있구나
별 하나 지상에 내려서서 자기의 뿌리를 걷지 않는다


 

 

 

봄                                                          
 

노오란 아기 고무신 한 켤레
한길 가운데 떨어져 있네
참 이상도 하지
자동차 바퀴들이 떠들며 달려오다
멈칫 비켜서네


쓰레기터 옆 버스정류소에는
먼지 뽀얗게 뒤집어쓴 개나리 꽃망울
터질락 말락 하고 있는데


'그으대에여어 사아아랑의 미이로오여'


버스에서 내린 한 사람
구르는 돌 하나 냅다 차 던지니
한길 속 거기에 가 서네


참 이상도 하지
햇볕에 젖은
노오란 아기 고무신
누군가 벗어놓은 살처럼 얌전히 꼼틀대는
봄의 깊은 뼈.


 

 

숲                                                         
 

나무 하나가 흔들린다.
나무 하나가 흔들리면
나무 둘도 흔들린다.
나무 둘이 흔들리면
나무 셋도 흔들린다.


이렇게 이렇게


나무 하나의 꿈은
나무 둘의 꿈
나무 둘의 꿈은
나무 셋의 꿈


나무 하나가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둘도 고개를 젓는다
옆에서
나무 셋도 고개를 젓는다


아무도 없다
아무도 없이
나무들이 흔들리고
고개를 젓는다


이렇게 이렇게
함께
 

 

 

우리의 적은                                             
 

우리의 적은
일 센티미터의 먼지와
스무 시간의 소음과
그리고 다시 밝는 하늘이다.


몇 번이라도 되아무는 상처와
서른 번의 숨소리와
뜨거운 손톱.


우리의 적은
전쟁이 아니다
부자유가 아니다
어둠 속에서도 너무 깊이 보이는
그대와 나의 눈.


십리 밖에 온 가을도
우리의 눈을 벗을 수는 없다
가을이 일으키는 혁명도
아아, 실오라기 연기 하나도.


어젯밤은 좋은 꿈을 꾸고
오늘 길을 떠난 아버지여,
그대 없이도 꿈 이야기는 살아서
즐겁게 저문 하늘을 날아다니다.


그렇다, 우리의 적은
저 끊어지지 않는 희망과
매일밤 고쳐 꾸는 꿈과
不死의 길.
그리고 아직 살아 있음.


 

자전                                                        
 

골목 끝에서 헤어지는 하늘을
하늘의 뒷 모습을
나부끼는 구름 저 쪽
사라지는 당신의 과거
부끄러운 모래의 죽음을
불의의 비가 내리고
마을에 헛되이 헛되이 내리고
등 뒤에는 때아니게
강물로 거슬러오는 바다
동양식의 흰 바다
싸우고 난 이의
고단한 옷자락과 함께 펄럭이고
너의 발 아래서 아 다만 펄럭이고
돌아가는 사람은
돌아가게 내버려두라
헤매는 마을의 저 불빛도
깊은 밤 부끄러운 내 기침소리도
용서하라 다시 용서하라
바람은 가벼이 살 속을 달려가고
일생의 가벼움으로 달려가고
뜰에는 아직
멈추지 않는 하늘의
하루 뿐인 짧은 내 뒷모습
반짝이는 반짝이는 잠을 
 


 
자전 3                                                     
 

문을 열면 모든 길이 일어선다
새벽에 높이 쌓인 집들은 흔들리고
문득 달려나와 빈 가지에 걸리는
수세기 낡은 햇빛들
사람들은 굴뚝마다 연기를 갈아 꽂는다
길이 많아서 길을 잃어버리고
늦게 깬 바람이 서둘고 있구나
작은 새들은
신경의 담너머 기웃거리거나
마을의 반대쪽으로 사라지고
핏줄 속에는 어제 마신 비
출렁이는 살의
흐린 신발소리
풀잎이 제가 입은 옷을 전부 벗어
맑은 하늘을 향해 던진다


문을 열면 모든 길을 달려가는
한 사람의 시야
허공에 투신하는 외로운 연기들
길은 일어서서 진종일 나부끼고
꽃밭을 나온 사과 몇 알이
폐허로 가는 길을 묻고 있다


  
 

진눈깨비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부서지며 맴돌며
휘휘 돌아 허공에
자취도 없이 내리네
내 이제껏 뛰어다닌 길들이
서성대는 마음이란 마음들이
올라가도 올라가도
천국은 없어
몸살치는 혼령들이
안개 속에서 안개가 흩날리네
어둠 앞에서 어둠이 흩날리네
그 어둠 허공에서
떠도는 허공에서
떠도는 피 한 점 떠도는 살 한 점
주워 던지는 여기
한 떠남이 또 한 떠남을
흐느끼는 여기
진눈깨비가 내리네
속시원히 비도 못 되고
속시원히 눈도 못 된 것
그대여
어두운 세상 천지
하루는 진눈깨비로 부서져 내리다가
잠시 잠시 한숨 내뿜는 풀꽃인 그대여. 
 

 

 

풀잎                                                       
 

아주 뒷날 부는 바람을
나는 알고 있어요
아주 뒷날 눈비가
어느 집 창틀을 넘나드는지도
늦도록 잠이 안 와
살 밖으로 나가 앉는 날이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김없이
울며 떠나는 당신들이 보여요
누런 베수건 거머쥐고
닦아도 닦아도 지지않는 피들 닦으며
아, 하루나 이틀
해저문 하늘을 우러르다 가네요
알 수 있어요, 우린
땅 속에 다시 눕지 않아도

 

 

 

 

빨래 너는 여자                                            

 

햇빛이 ‘바리움’처럼 쏟아지는 한낮, 한 여자가 빨래를 널고 있다, 그 여자는 위험스레 지붕 끝을 걷고 있다, 런닝 셔츠를 탁탁 털어 허공에 쓰윽 문대기도 한다, 여기서 보니 허공과 그 여자는 무척 가까워 보인다, 그 여자의 일생이 달려와 거기 담요 옆에 펄럭인다, 그 여자가 웃는다, 그 여자의 웃음이 허공을 건너 햇빛을 건너 빨래통에 담겨 있는 우리의 살에 스며든다, 어물거리는 바람, 어물거리는 구름들,

 

그 여자는 이제 아기 원피스를 넌다. 무용수처럼 발끝을 곧추세워 서서 허공에 탁탁 털어 빨랫줄에 건다. 아기의 울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 여자의 무용은 끝났다. 그 여자는 뛰어간다. 구름을 들고.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봄이 오고 있다
그대의 첫사랑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눈동자의 맨발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이 밟은 풀잎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이 나부끼는 바람 곁으로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아침 햇빛이 꿈 꾼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 위의 반짝이는 소리
곁으로 곁으로 맴도는 그대의 첫사랑의 맨발의
풀잎의 바람의 아침 햇빛의 꿈 엷은 살 속
으로 우리는 간다. 시간은 맨머리로
간다, 아무도 어찌할 수 없다.
그저 갈 뿐, 그러다 햇빛이
되어 햇빛 속으로 가는
그대와 오래 만나리
만나서 꿈꾸리
첫사랑 되리.


 

 

 

전화                                                      

 

아마, 다이얼을 돌려본 이들은 알 거예요. 그것이 어떻게 닿지 않는 것
을 닿게 하는지를. 뛰뛰거리는 신호음이 들릴 때면, 아 반가움, 그 사람
이 뛰어오고 있군요 ……가슴을 벌리고, 혀를 움칫거리며, 온몸의 동맥
과 정맥 들을 펄럭펄럭, 허파에 산소를 불러들이며 ……그러나 오늘은
부재, 저 공중을 건너 저 바람을 건너 저 안개를 건너 건너 아라비아 숫
자 여섯 싸늘하게 앉아 있을 뿐,


눈부신 섬, 당신의 뼈.

 

 

 

 

 

별똥별                                                   


밤하늘에 긴 금이 갔다
너 때문이다

밤새도록 꿈꾸는

너 때문이다

 

 

 

 


 

 

 

 강은교                                                                                                
 
1945년 함남 홍원 출생.
연세대 영문과 졸업. 연세대 대학원 국문과 졸업. 문학 박사. 동아대 국문과 교수.
제2회 한국 문학 작가상 수상.
1968년 '사상계'신인 문학상에 '순례자의 집'이 당선되어 등단함.
윤상규, 임정남, 정희성, 김형영등과 '70년대' 동인으로 활동함.


[주요 시집]
 
시집 <허무집> 70년대 동인회  1971
시집 <풀잎> 민음사  1974
시집 <빈자일기> 민음사  1978
시집 <그대 곁에 머무는 말은(공저)> 우석출판사  1980
시집 <소리집> 창작과비평사  1982
시집 <붉은 강> 풀빛  1984
시집 <우리가 물이 되어> 문학사상사  1987
시집 <바람노래> 문학사상사  1987
시집 <순례자의 꿈> 나남  1988
시집 <슬픈 노래> 자유문학사  1988

[그 외 대표작]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 문학동네  
『등불 하나가 걸어오네』 | 문학동네  
『어느 별에서의 하루』 | 창작과비평사 
 

 

작가 이야기 
 
허무의 바다에서 돛을 올리는 시세계


시의 위의(威儀)가 여러모로 훼손되고 있는 이즈음, 강은교 시인이 우리에게 보내는 시편들은 작은 축복처럼 느껴진다. 피폐한 우리의 영혼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작은 등불처럼, 시인은 오늘도 어디선가 "저 반짝이는 거품들 사이에서 물고기 한 마리를 건지듯 상황 하나를 건지기 위하여, 혹은 우리에게 우리를 알려주는 은유 하나를, 끝내는 당신의 삶을 쓰다듬을 수 있는 은유 하나를" 낚기 위해 허공의 바다에 낚싯대를 드리워 놓고 있다.


이처럼 강은교의 시세계는 허무(허공)의 바다에서 돛을 올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에게 허무란 오랫동안 면벽좌선하여 터득한 선(禪)의 경지도 아니며, 이 세상을 다 살아본 노인들이 체득한 삶의 무상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현실의 삶의 다양한 무늬가 현상되기 이전의 자의식의 영도(零度)이자 '백지상태(tabula rasa)'이다. 촬영 이전의 순도(純度) 높은 필름인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허무는, 김병익의 예리한 표현처럼, 의식이 순수한 결정으로 남을 때까지 모든 것을 분해, 제거함으로써 인식이 가능한 종말과의 해후(邂逅)다. 그럼으로써 오롯이 빛나는 자의식의 투명성!

 

다시 말해 삶의 허울과 허위를 대담하게 사상(捨象)시켰을 때 남는 절대적 '시원의 시원', 또는 "한 겹씩 벗겨지는 생사의/저 캄캄한 수 세기"('자전(自轉) 1') 속의 심연과도 같은 곳이다. 그의 시가 주술적인 이미지들과 비의적인 상상력, 그리고 유현한 상징들로 가득 차 있는 까닭은 여기에 있다. 예컨대 허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설교로 보라: "길은 어디에도 있고/그러나/어느 곳에도 이르지 않는다."('길') 정주와 유목을 동시에 욕망 하는 길, 존재와 부재, 삶과 죽음을 한 몸에 지닌 존재론적 비애가 바로 길의 근원, 즉 허무의 본질이 아닌가.

이처럼 시인은, 신경림 시인이 갈파한 대로, 삶/죽음이나 현상/존재를 '등가적 동시적'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지금 이 순간 또 어디서 "탈주하지 않으면서 탈주하는 것, 끊임없이 기표를 살해하면서 기의를 얻으려고 하는 것, 아, 언어"(<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낚으려고 하는 걸까. 그가 조용미 시인이 상상 속에서 그린 "비가 쏟아져내리면 일만 마리 물고기가 산정에서 푸덕이며 금과 옥의 소리를 낸다는 萬魚山"('萬魚山'), 다시 말해 물고기 등에 산이 솟아올라 있다는 그 신비의 물고기 한마리를 건져 올릴 수 있을지, 자못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류신/문학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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